[주부 주부들]「바느질 도사」 원현자씨

  • 입력 1996년 12월 23일 21시 00분


「尹景恩기자」 서울 방배동의 한 주택가 골목에는 지난해 여름 청록색의 땡땡이 무늬 탱크탑이 한창 유행했다. 이곳에 사는 10여 명의 여자들이 엄마 딸 할 것없이 죄다 똑같은 모양, 똑같은 무늬의 옷을 입고 다닌 것. 『동대문시장에서 끊어온 천으로 만든 옷을 이웃주부들이 너도나도 예쁘다고 만들어 달라는 바람에 난데없는 유행이 됐죠』 동네에서 바느질도사로 소문난 주부 원현자씨(52)가 이 유행의 주인공. 평소에도 「바짓단을 내달라」 「허리를 줄여달라」며 찾아오는 이웃의 부탁을 선선히 들어주던 원씨는 천값만 받고 옷을 다 만들어 주었다. 양재를 배운 스무살 때부터 지금까지 옷을 사입어본 적이 별로 없다는 원씨. 『드르륵 드르륵 몇 시간 재봉틀을 돌리면 옷 한벌이 뚝딱 만들어지는데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옷을 사입을 필요가 없잖아요』 매번 꾸중을 들으면서도 기어이 어머니 솜저고리를 뜯고 자투리천을 모아 갖가지 인형옷을 만들며 놀던 어린 시절의 바느질솜씨도 한 몫 했다. 세 딸의 여름원피스부터 자신의 모직바지, 남편의 모시적삼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원씨가 만든 작품은 셀 수 없을 정도. 그 중 딸들에게 예쁜 옷을 만들어 입힐 수 있는 게 무엇보다 기쁘고 큰 보람이다. 딸 양수미(27·LG전자) 혜원(26·대해컨설팅) 정원씨(23·LG―EDS시스템)자매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만든 옷에 싸여 지냈다. 유치원 세일러복도 단체로 맞춰입은 것보다 훨씬 깜찍해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패션잡지에서 맘에 드는 옷을 골라 어머니에게 부탁하면 금세 똑같은 옷이 하나 생겼다.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옷은 들어가는 정성도 정성이려니와 체형에 꼭 맞고 튼튼하다는 것이 장점. 겨울코트에는 안감을 두툼히 대고 뜯어지기 쉬운 부분에는 두세번씩 박음질을 한다. 원씨는 지금도 딸과 함께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유행하는 디자인을 꼼꼼히 살핀 뒤 동대문시장에서 옷감까지 골라온다. 의류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딸들 몫으로 최고급 옷감을 가져다준 적도 여러번이다. 20년전 인형드레스를 만들어달라고 조르던 세 딸은 이제 다 커 어머니에게 혼수예단을 부탁한다. 지난해 첫째딸이 결혼할 때 명주솜을 사다 이불 네 채를 정성껏 만들어 주었더니 내년봄에 결혼하는 둘째딸도 벌써부터 기대하는 눈치다. 원씨는 30년 넘게 써오던 낡은 재봉틀을 얼마전 버리고 47만원의 거금을 들여 재봉틀을 또하나 장만했다. 눈이 어두워져 2년전부터는 안경을 쓰고서야 바늘귀를 꿰지만 새 재봉틀로 막내딸의 침대커버를 해줄 생각에 마음은 벌써 바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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