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실사구시 경제학

  • 입력 1996년 10월 15일 10시 05분


S그룹과 거래를 트고 있는 서울 서소문 일대 은행지점 10여곳엔 지난 5월 중순 한 때 초비상이 걸렸다. 적금과 신탁 등 S사명의의 각종 예금 인출러시가 일면서 적게는 수십억원, 많은 곳은 수백억원의 돈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발단은 반도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수출가격 폭락으로 S사의 자금계획에 큰 구 멍이 생겼고 소요자금 마련이 급했던 것. 은행예금을 깨고 대출도 받았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곧 이어 제2금융권의 엄청난 자금이 S사로 빨려들어갔고 그래도 부족자금을 메우지 못해 회사채 발행 계획까지 세웠다. 자금관리에 관한 한 한치의 빈틈이 없는 S사의 이런 움직임은 금융시장에 일파만 파의 파장을 몰고 왔다. 다른 기업들이 동요했다. 자금수요가 폭증하면서 시장금리가 급등했다. 이후 금리 는 9월말까지 상승세를 기록했다. 금리는 이처럼 시장요인에 의해 변동한다. 오를 이유가 있으면 오르고 내릴 사정 이 생기면 떨어지는 게 금리다. 이것이 금리의 시장기능이고 이른바 경제원리다. 요즘 유행어인 「구조개혁」도 따지고 보면 이런 기본원리에 충실하자는 외에 다 름아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금리인하정책은 그래서 더 문제다. 10년전에 비해 대응의 자세가 달라진게 별로 없다. 정부의 입김이 강한 것도 그렇 고 임기응변이나 단기목표에 집착하는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말이 금리에 대한 협조요청이지 반쯤은 강제적이다. 이쯤되면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은행으로선 어떤 형태든 성의표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목상 금리가 내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거야말로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이다. 세상에 손해보는 돈장사는 없다. 은행은 당연히 기업자금을 꺾기해서 즉각 인하분 을 보충한다. 그러니 기업엔 전혀 도움되는 것이 없다. 정부가 요즘 골몰하고 있는 「경쟁력 10% 높이기」도 내실(內實)과는 거리가 먼 나열집(羅列集)이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수십가지의 항목이 요란하지만 정책간 연계성도 없고 과거의 것을 강도만 약간 높 여 재탕한 것이 여러개다. 이를테면 기업에 대한 것도 그렇다.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요점이 분명치 않다. 현실적인 경쟁력 방안이 나오려면 우선 재벌기업의 실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기업은 정부에 대해 규제다 뭐다해서 끝없이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나라 간판기업중 하나인 H자동차의 사업보고서를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작년6월∼올 6월말까지 1년간 부채규모가 1조4천억원가량 늘었는데 차입금의 상당 부분을 계열사 출자, 회사채인수 등에 충당했다. 제발등의 경쟁력이 급한데 계열사 먹여살리기에동원되고있는 것이다. 투자를 위한 내부유보가제대로 쌓여 있을리가 없다. 이런 것을 당연시하는 풍토가 한국의 재벌이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이지경이 된 것은 경영자원을 집중화하지 않은 기업에 1차적 인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최근 깃발을 올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멤버십도 겉모양이 아닌 실사 구시(實事求是)의 경제를 요구한다.이 인 길(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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