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팔뚝만 굵다고 이기나… “문제는 기술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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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씨름, 이제 어엿한 스포츠

다이너마이트 팀원들이 체육관에서 덤벨을 들고 힘을 뽐내고 있다. 팀원의 연령대는 10대 고등학생부터 아버지뻘인 50대까지 다양하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다이너마이트 팀원들이 체육관에서 덤벨을 들고 힘을 뽐내고 있다. 팀원의 연령대는 10대 고등학생부터 아버지뻘인 50대까지 다양하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손을 잡는 순간 승리를 직감했다. 테이블 맞은편의 상대는 170cm 중반의 키에 마른 체형의 고등학생. “기술을 배운 분을 어떻게 이기겠어요”라고 엄살을 부렸지만 100kg이 넘는 거구인 내 속내는 정반대였다.

‘내가 학교 팔씨름대회 반대표 출신인데… 질 리가 없지.’

“레디, 고!”

심판의 소리와 함께 시작된 승부. 하지만 실상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이상했다. 아무리 힘을 줘도 상대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순간만큼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무시되는 기분이었다. 상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승부는 그대로 끝났다.

졌다.

체육관 내에 있던 다른 고등학생, 20대 청년 가리지 않고 다시 손을 잡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동네북이 됐다. 그저 힘만 세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팔씨름. 하지만 이곳에도 엄연한 규칙이 있었고, 기술의 묘가 숨어 있었다. 전국에 즐비한 팔씨름 고수, 각종 팀과 대회는 이곳이 왜 무림의 세계인지 금세 깨닫게 했다.

팔의, 팔을 위한, 팔에 의한

21일 오후, 서울 강서구 공항동의 한 건물 지하 1층 체육관. 50평 남짓한 이 공간은 국내 최대 팔씨름 커뮤니티 ‘그립보드’에서 활동하는 다이너마이트팀의 팔씨름 전용 체육관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넘어가는 법을 배워야 넘기는 맛도 아는 법”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은 일반 헬스클럽과 비슷한데 대부분의 운동기구가 상체 운동 중심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반 헬스클럽에 당연히 있는 러닝머신 하나 없을 정도다. 그 대신 체육관 한쪽 벽면에는 100여 개의 악력기가 마치 신발가게의 하이힐처럼 색상, 모양별로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덤벨도 일반 헬스클럽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75kg짜리까지 있었다.

이곳에서 이뤄지는 모든 운동의 목적이 곧 팔씨름이다. 각종 웨이트트레이닝 기구에는 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상대 선수의 손을 잡았을 때의 느낌을 익히며 근력 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심지어 손가락 힘을 기르기 위해 스포츠 클라이밍 훈련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

체육관 내 절반이 운동기구라면 나머지 반은 팔씨름 전용 테이블이 채우고 있다. 그저 학교에서 볼 법한 책상을 생각하면 오산. 시중에서 팔씨름 전용 테이블을 구하려면 70만∼80만 원은 줘야 한다. 국제 대회 기준에 맞는 제품은 값이 200만 원 가까이 하기도 한다.

직사각형 모양의 팔씨름 테이블은 크게 팔꿈치 패드와 손잡이, 터치 패드로 구성된다. 정사각형 팔꿈치 패드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나머지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은 채 경기를 시작한다. 두 선수 중 한쪽의 손의 손등이 정확하게 터치 패드에 닿는 순간 경기는 끝난다.

세계팔씨름연맹(WAF)이 정한 테이블의 국제 규격은 가로 92cm, 세로 66cm. 다소 좁다는 느낌도 들지만 팔꿈치를 어디에 대느냐, 손잡이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얼마든 다양한 경기 운영이 가능하다고 한다. 경기 유형에 따라 테이블의 높이는 입식은 102cm, 좌식은 71cm로 구별되지만 1993년 이후 주로 입식 경기를 하는 추세다.

다음 달 4일 미국에서 열리는 아널드 스포츠 페스티벌 팔씨름 대회에 참가하는 소진수, 김보현, 이태경 씨(왼쪽부터). 청주=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다음 달 4일 미국에서 열리는 아널드 스포츠 페스티벌 팔씨름 대회에 참가하는 소진수, 김보현, 이태경 씨(왼쪽부터). 청주=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외국에선 엄연한 스포츠

팔씨름은 언제 어느 때고 할 수 있어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인기를 누린 엄연한 스포츠다. 국내 팔씨름이 아직 걸음마 단계라면 미국, 러시아 등 외국에서는 스포츠로 뿌리를 내린 지 오래. 팔씨름대회에 나선 아버지(실베스터 스탤론)와 아들의 정을 그린 영화(오버 더 톱·Over the top·1987년)까지 제작됐을 정도다. 1977년 불가리아에서 발족한 WAF에는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 등 85개국이 가입해 있다. WAF가 주최하는 세계선수권대회도 매년 열린다.

당연히 국제 규칙도 따로 세세하게 마련돼 있다. 예를 들어 호명된 선수가 테이블 앞에 30초 이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경우 1패로 간주된다. 선수의 어깨가 경기 중에 양 손잡이 사이의 중앙선을 넘을 경우, 팔꿈치가 팔꿈치 패드에서 떨어질 경우에도 파울이 선언된다. 부적절한 언어, 신체적 폭력, 스포츠맨십 위반 등이 있을 때도 파울을 받는다. 파울을 두 번 받는 즉시 패배다.

손잡이는 경기 상황에 따라 잠시 놓칠 순 있지만, 손잡이를 놓음으로써 경기 향방에 영향을 줬다고 판단될 경우 경고를 받는다. 경고 두 번이면 파울 하나로 계산된다.

이색 규정도 눈에 띈다. 머리카락이 긴 선수는 반드시 머리를 묶거나 정돈해야 한다. 머리띠는 허용되지만 모자는 쓸 수 없다. 상대방이 다치지 않도록 손톱도 미리 다듬어야 하고, 손을 맞잡을 때는 서로의 엄지 첫 번째 마디가 드러나야 한다. 씨름에서 경기 전 샅바 싸움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그립 싸움이 과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국제대회에서는 주심과 부심, 2명의 심판이 경기를 진행한다. 한쪽에서만 경기를 볼 경우 반대쪽에서 손등이 닿거나, 반칙을 하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 2명이 필요하다. 대전 중 손이 미끄러져 손을 놓칠 경우 두 손을 스트랩으로 묶는 ‘스트랩 매치’를 진행하기도 한다. 대진 방식은 토너먼트, 더블 일리미네이션 중 후자를 주로 택하는 추세다. 짧으면 수초 만에 승부가 갈리는 상황에서, 단판으로 탈락자를 가리기보다는 적어도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서다.

힘만으로는 안 되는 기술 경기

팔씨름은 힘만 세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승부는 기술이 가른다는 게 공통된 설명이다. 보통은 팔씨름에 기술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자처럼 이들과 처음 경기를 하는 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낯선 기술에 속절없이 당하곤 한다.

팔씨름 기술은 크게 톱 롤(Top Roll), 후크(Hook), 프레스(Press) 등 세 종류로 나뉜다. 톱 롤은 손목을 바깥쪽으로 말면서 상대 손목을 젖혀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기술이다. 자신의 손을 상대의 손 위에 만다고 해서 톱 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손목을 위로 올리느냐 아래로 내리느냐에 따라서 하이 톱 롤, 로 톱 롤로도 구분한다.

후크는 손목을 갈고리 형태로 안쪽으로 꺾어 힘을 주는 기술이다. 마찬가지로 하이 후크, 로 후크로 나뉜다. 프레스는 팔을 최대한 몸에 붙여 체중을 실어 내리찍는 방법이다. 이 세 가지 기술을 손가락의 위치, 힘의 방향 등을 신경 써가며 여러 가지로 응용한다.

개인의 스타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기술 간에도 먹이사슬이 있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검지, 중지의 힘을 쓰지 못하도록 손목을 트는 하이 톱 롤은 해당 손가락의 힘으로 손목을 마는 하이 후크에 강하다. 김도훈 다이너마이트 팀장(30)은 “상대방의 스타일에 따라 자신의 유형을 바꿀 때도 있고 상대가 헷갈리도록 그립을 다른 모양으로 잡기도 하는 등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진다”고 설명했다. 의외로 기술로 승부가 나는 경우가 많아 근력이 떨어진 50대 이상 장년층 회원들이 젊은이들을 꺾는 경우도 많단다.

순식간에 승부가 갈리는 것도 팔씨름의 매력이다. 다이너마이트 운영진인 정후중 씨(29)는 “길면 30초, 대부분 10초 안에 승부가 결정 난다”며 “1, 2초 안에 승부가 갈리는 것이 팔씨름의 묘미”라고 말했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근력을 쏟아붓다 보니 하루 종일 팔씨름을 할 수 없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한다. 정 씨의 아내 조혜진 씨(28)는 “야구, 축구 같은 것은 한 번 경기를 하면 짧아도 반나절이 걸리는데 팔씨름은 대부분 두 시간 안에 끝나고, 특히 돈이 거의 안 들어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느껴지는 희열도 팔씨름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더 강한 상대를 찾는 수컷의 본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자발적으로 팔씨름을 찾아 하는 이들의 경우 대개 동네에선 맞수가 없을 정도로 실력자여서 막상 대결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김 팀장은 “자기 실력 하나만 믿고 체육관을 찾아왔다 자존심이 꺾여 발길을 끊는 이들도 많지만 대개 승부욕이 강한 만큼 악착같이 달라붙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동호회 회원만 1만3000여 명

‘애들이나 팔씨름을 하지, 누가 하겠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2010년 출범한 그립보드의 등록 회원만 1만3000여 명에 달한다.

실력에 따라 프로, 아마추어로 나뉘고 신인, 학생 부문도 있다. 프로 수준으로 활동하는 선수는 80여 명. 서울 대구 강원 등에 근거를 둔 팀만 10개다. 일반 회원은 10, 20대가 많지만, 프로는 20대 후반∼30대가 대부분이다. 거친 일을 하는 직업적 특성 때문일까. 회원 중에는 경찰이 가장 많은 편이라고 한다. 그 밖에 학생부터 자영업자, 법조인, 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팔씨름을 즐긴다.

그립보드에서 주최하는 대회는 물론이고 개인 맞대결도 대부분 커뮤니티를 통해 이뤄진다. 커뮤니티에서 맞대결(배틀 암·Battle Arm)을 신청하면 약 3주 뒤에 경기가 열린다. 대결에 앞서 몸 컨디션을 최대한 끌어올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 씨는 “워낙 체력 소모가 많기 때문에 한번 대결을 하면 회복에만 보통 2주 정도가 걸린다”고 말했다. 랭킹 시스템은 또 다른 재밋거리다. 대회 참가, 맞대결 결과에 따라 포인트를 적용해 왼팔, 오른팔 체급별로 순위를 매긴다. 랭킹 시스템만 관리하는 전담자를 따로 둘 정도다.

배틀 암이 성사되면 커뮤니티에서는 승자를 예측하는 사전 투표도 진행한다. 경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주최 측은 프로 레슬러 간의 대결을 연상시키는 포스터를 만들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배포한다. 팔씨름을 직접 하는 재미만큼 보는 재미도 키우기 위해서다.

배승민 그립보드 대표(32)는 “팔씨름을 단순한 놀이에 그치지 않고 체계화, 대중화해 정식 스포츠로 키우고 싶은 것이 꿈”이라며 “일단 그립보드부터 올해 안에 사단법인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립보드가 주최하는 올해 첫 대회는 다음 달 26일 서울 홍익대 인근 소극장에서 열린다.

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팔씨름#그립보드#아널드 스포츠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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