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김영덕 감독 “84년 유두열 한방에 무너진 삼성…두고두고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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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2월 14일 07시 00분


1993시즌을 끝으로 프로야구 1군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우승 감독이자, 페넌트레이스에서 가장 높을 승률을 
기록한 감독은 벌써 희수의 노신사가 됐다. 여전히 기억하는 팬도 많고 찾아오는 제자도 여럿이다. 온화한 미소를 보면 그가 그때 그
 승부사였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따뜻하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1993시즌을 끝으로 프로야구 1군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우승 감독이자, 페넌트레이스에서 가장 높을 승률을 기록한 감독은 벌써 희수의 노신사가 됐다. 여전히 기억하는 팬도 많고 찾아오는 제자도 여럿이다. 온화한 미소를 보면 그가 그때 그 승부사였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따뜻하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 김영덕 감독의 ‘야구는 내 인생’ (하)

84∼86년 삼성 감독

KS 7차전서 김일융-송일수 베테랑 배터리
몸쪽 공만 조심하면 되는데…너무 믿었어
그해 이만수 타격 3관왕 밀어주기 탓 비난
감독이 돕는게 당연했고 배려라고 생각했지

88∼93 빙그레 감독

김승연 회장과 의리로 빙그레 사령탑 맡아
승승장구에도 ‘종신 계약설’ 악재에 와르르
쉰아홉 나이에 1000승의 꿈 접고 감독 은퇴
준우승만 4번…아직도 팬들에 죄송할 따름

김영덕은 1984년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감독으로 결정된 뒤 노진호 단장과 함께 인사를 갔다. “이건희 부회장을 만났다.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습니다’하고 인사했다. 이 부회장은 ‘당연하지’라고 한마디를 했다.”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

1984년 삼성은 최강의 전력이었다. 거뜬히 전반기 우승을 차지했다. 후반기 한때 통합우승까지 노렸으나 7월 말 페이스가 처지자 전략을 수정했다. OB와 롯데 가운데 어디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택하느냐는 삼성의 판단이었다. 덤으로 이만수의 타격 3관왕 만들기도 가능했다. 이때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이 탄생했다. 김영덕이 말했다고 알려졌다. “그 말은 내가 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만든 말이다. 당시 야구계는 그런 선택을 당연히 했다. 내가 앞서서 비난을 받았을 뿐이다. 내가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성격인데다, 학연 지연이 없어 표적이 됐을 것이다. 일본 난카이에서 야구를 할 때 모셨던 감독이 쓰루오카였다. 별명이 ‘오야붕’이었다. 그 감독도 ‘선수가 열심히 하는데, 감독은 도와줘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조작은 상대 선수와 짜고 하는 것이지만, 감독이 선수를 쓰거나 안 써서 기록과 타이틀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배려라고 배웠다.”

○1984년 운명의 한국시리즈 7차전

1984년 롯데-삼성의 한국시리즈가 펼쳐졌다. 10월 9일 7차전. 삼성 김일융과 롯데 최동원의 선발 맞대결. 삼성은 2회 3-0 리드를 잡은 뒤 6회 오대석의 홈런으로 4-1로 앞서갔다. 그 순간 김영덕은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7회 2점을 내줘 4-3으로 쫓겼다. 운명의 8회가 왔다. 1사 1·3루서 타자는 유두열. 김일융도 지쳐 있었다. “당시 유두열은 전혀 방망이가 맞지 않았다. 그런 타자에게 홈런을 맞은 것은 배터리의 실수다. 내가 아쉬운 것은 그 때 마운드에 올라가서 직접 어드바이스를 해주지 않은 것이다. 유두열은 몸쪽 직구밖에 치지 못하는 타자였으니까, 그 공만 조심하라고 확실히 얘기했어야 했다. 송일수 김일융 모두 베테랑이라 믿었다. 다른 투수는 준비시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감독도 에이스를 믿는다. 상위타선도 아니고. 피곤했다지만 에이스였기에 위기를 넘길 것으로 믿었다.” 그렇게 김영덕과 삼성은 실패를 맛봤다.

○1985년 가을잔치를 없애버리다!

1985년 삼성은 스프링캠프를 위해 미국 플로리다주 베로비치로 날아갔다. 우승을 위한 투자였다. “훈련 시설이 어마어마했다. 우리가 배운 것과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다저스 캠프의 최고 수혜자는 김일융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1985년 삼성은 전·후기 통합우승을 거뒀다. 프로야구 30여년의 역사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한국시리즈가 무산됐다. 77승1무32패로 역대 최고승률(0.706). 그해 삼성은 감히 누구도 이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설사 한국시리즈가 열렸더라도 4전승을 거둘 압도적 전력이었다. “그해 투수들이 좋았다. 김시진 김일융에게 원하는 대로 쉬고 던져도 좋다고 했다. 그런데 두 명 모두 이틀 쉬고 던지겠다고 했다.”

○1986년 불탄 해태버스와 전화 한통

1986년 삼성은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85년 삼성의 통합우승 이후 새 제도가 생겼다. 삼성은 최대 피해자였다. 삼성은 전기리그 우승과 함께 시즌 전체 승률 1위였다. 그러나 바뀐 제도로 인해 김성근이 지휘하는 후기리그 우승팀 OB와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전·후기 각각 2위를 차지한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삼성은 OB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3승2패로 힘겹게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1차전을 앞둔 오전이었다. 광주 숙소에 있는데 그룹 고위 간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경기부터 번트 대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누구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5∼6회에 무사 1루 기회였는데 강공을 하다 실패했다. 이후 안타가 나왔다. 그때 점수를 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3차전 뒤 해태 구단 버스는 불탔고, 삼성은 1승4패로 무너졌다. 한국시리즈를 마친 뒤 삼성에 작별인사를 했다. 이종기 사장에게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고 했다. “그런 좋은 선수를 가지고 통합우승 한 번밖에 하지 못한 것은 내 책임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만일 삼성에서 우승을 더 했더라면 내 야구인생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988년 의리를 생각하며 빙그레로 가다!

야인으로 1년을 쉬었다. 1988년 빙그레 유니폼을 입었다. 대전행은 자신을 믿어주고 의리를 생명으로 알았던 한국화약그룹 김승연 회장의 뜻이었다. “천안북일고 감독 시절 성적부진에 사표를 냈다. 김종희(작고) 회장이 나를 불렀다. ‘내가 많은 회사 가지고 있는데 당신을 쫓아내겠느냐. 원하면 어느 회사에 이사 자리는 줄 수 있다. 걱정 말고 하라’고 했다.” 김영덕은 1981년 한국화약그룹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희수 코치, 천안북일고 선수들과 함께 직접 운구를 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그룹의 고위인사가 ‘빙그레에 와달라’고 했다. 1986∼1987년 신생팀의 이미지를 벗지 못한 빙그레였다. 1988년 김영덕이 새로 지휘한 빙그레는 전혀 다른 팀이 됐다. 전기리그에서 대뜸 우승을 했다. 김영덕은 빙그레 재임 6년간 4차례 한국시리즈에 나갔다. 1993년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팀을 떠났을 때도 5할 승률을 했다. 빙그레∼한화의 역사상 그처럼 화려했던 시절은 없었다. 단지 사람들은 가을의 슬픔만을 기억했다. 김영덕은 그래서 여전히 빙그레 팬들에게 미안하다. “4번의 기회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면 감독의 책임이다. 인정한다. 투수기용, 교체시기, 작전 등 패배 뒤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단 한번이라도 다른 결정을 했으면 결과가 어땠을까.”

○1990년 종신계약설의 진실

1990년 빙그레에 기회가 왔다. 시즌 중반까지 선두였다. 해태에도 4연속 우승의 후유증이 보였다. 그러나 적은 내부에 있었다. 수석코치 강병철과의 불화가 노출됐다. 세간에 알려진 ‘종신계약 파문’이었다. 재계약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자 구단 간부는 김영덕 강병철과 함께 회장실을 찾았다. 5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승연 회장은 “감독 더 하시오”라고 했다. 이 말이 종신감독으로 둔갑했다. 김영덕은 강병철을 따로 만났다. “2년만 기다려주라. 그 뒤에 네게 물려줄게”라고 했다. 입을 다물었던 강병철은 롯데로 갔다. 그 와중에 선수단의 멘탈이 무너졌다. 시
즌 1위에서 4위로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무너졌다.

신생팀 빙그레를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 리그 최강의 팀으로 이끈 김영덕 전 감독은 2012년 대전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하며 오랜만에 오렌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스포츠동아DB
신생팀 빙그레를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 리그 최강의 팀으로 이끈 김영덕 전 감독은 2012년 대전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하며 오랜만에 오렌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스포츠동아DB


○1993년 빙그레와 이별하다!

한국시리즈에 계속 올랐지만 1991년에는 해태에 또 졌고, 1992년에는 하필 강병철의 롯데에 패했다. 한국시리즈에서 4번 실패하자 프런트의 불만도 높아졌다. 1993년에는 대놓고 무시했다. 빙그레 수뇌부는 롯데 강병철 감독과 공공연히 바둑을 뒀다. 이제 그만하고 나가라는 표시. 평소 매스컴에 친화적이지 않은 그를 지역 언론에서도 연이어 두들겼다. “구단은 패배에 대해 시말서를 쓰라고 했다. 출전선수 명단도 보고하라고 했다. 코칭스태프 회의를 하는데, 녹음기를 들이대는 프런트 간부도 있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었다. ‘올해 끝나고 팀을 떠나겠다’고 했다.” 1993시즌을 끝으로 김영덕은 11년간의 감독생활을 마쳤다. “나이 59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야구를 한참 더 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1군 감독으로 내 야구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팬들은 페넌트레이스에서 김영덕이 만드는 매직을 더 이상 보지 못했다. 통산 1224경기에서 717승20무487패를 기록했다. 역대 감독 페넌트레이스 최고 승률 0.596. 1번의 한국시리즈 우승, 1번의 전·후기 통합우승, 6차례 준우승을 남겼다.

○아쉽고 미안한 마음으로 1000승의 꿈을 접다!

“꿈은 1000승을 하고 물러나는 것이었다. 700승까지는 어느 감독보다 먼저 했지만, 이후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현역에서 물러난 뒤 분당에서 가족과 지내며 가끔 후배나 제자들을 만난다. 현역 시절에는 하지 않았던 골프를 소일거리로 배워 뒤늦게 열심히 했으나, 지난해 위암수술을 받은 뒤로는 조심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빙그레에서 함께 지냈던 제자들은 그를 초대해 식사대접을 한다. “이상군 한희민 이정훈 이강돈 강정길 장종훈 유승안 등 고마운 선수들이다. 20년이 지났는데도 기억해주는 선수들을 보면 ‘야구를 잘해왔구나’하고 생각한다. 감독은 좋은 선수를 만나야 하고, 선수도 좋은 감독을 만나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운이 좋았다. 일본에서 건너와 국가대표도 하고 대표팀 감독도 했다. 세계청소년대회 우승도 했다. 아쉬운 것은 빙그레에서 6년간 4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지만, 한 번도 못이긴 일이다. 그것이 팬들에게 죄송할 뿐이다.”

김영덕은?

▲생년월일=1936년 1월 2일(출생지 일본)
▲출신교=일본 즈시카이세이고교(우투우타)
▲선수 경력=1956년 난카이 호크스(현 소프트뱅크)→1964년 대한해운공사→1965년 크라운맥주→1966년 한일은행(1969년 은퇴)
▲지도자 경력=1970년 한일은행 감독→1977년 장충고 감독→1977년 북일고 감독→1982년 OB 감독(∼1983년)→1984년 삼성 감독(∼1986년)→1988년 빙그레 감독(∼1993년)→1998년 LG 2군 감독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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