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느리게 성공한 디키? 느려서 성공한 디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3년 2월 6일 07시 00분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이 LA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메이저리그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에 스포츠동아는 손건영 미국 통신원(사진)과 함께 한층 업그레이드된 내용과 지면 구성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손 통신원은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하던 시절, 현지의 라디오코리아와 국내의 KBS 제2라디오 등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국내외 여러 신문에 관련 기사를 기고해온 메이저리그 전문가입니다. 손 통신원은 앞으로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도전기’를 미국 현지에서 밀착취재하면서 생생한 소식을 독자 여러분께 빠르고 정확하게 전해드릴 것입니다. 아울러 메이저리그 전반에 걸친 심도 있고 다양한 정보도 함께 제공해드릴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편집자주>

팔꿈치 인대 없이도 너클볼 투수 첫 사이영상
39세 나이에 2년 2500만달러로 토론토 이적

구속 저하로 너클볼 입문…아내 내조도 큰 힘
메이저↔마이너 왕복 37차례 끝에 일군 성공

빠른 볼도 갖춰 위력…지난해 삼진만 230개


전 세계적으로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다가 미국도 망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인들은 19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때 박찬호와 박세리의 승전보에 환호하며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이제는 추신수(신시내티)와 류현진(LA 다저스)이 그 역할을 담당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힘든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누구나 좌절하게 된다.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고 아무리 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클볼 투수로는 최초로 사이영상을 받은 RA 디키(39)가 어떻게 역경을 이겨냈는지를 알게 되면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유망주에서 평범한 구속의 투수로 전락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에 빛나는 디키, 4대3 트레이드로 토론토 블루제이스 이적. 2년간 2500만달러 조건’. 최근 이렇게 각 신문의 스포츠 면을 장식한 귀에 익은 이름의 주인공인 디키에게도 크나 큰 시련이 있었다. 1974년 10월 29일 테네시주 내시빌에서 태어난 그의 풀 네임은 로버트 앨런 디키다. 몽고메리 벨 아카데미고교 시절부터 유망주였던 디키는 테네시대학으로 진학해 4년간 38승10패(방어율 3.40)를 거둬 팀 역사상 최다승 기록을 수립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고, 그해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18번째로 텍사스 레인저스에 지명됐을 때만해도 장밋빛 인생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4년간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친 디키는 2001년 꿈에도 그리던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았다. 그러나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던 2003년 9승8패로 잠깐 반짝했을 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둬 빅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가장 큰 원인은 구속의 저하였다. 우완 정통파지만, 시속 90마일대 초반(140km대 후반)을 유지했던 직구 최고 구속이 2004년에는 88마일(142km), 2005년에는 86마일(138km)까지 떨어졌다.

○허샤이저, 하우와의 만남으로 너클볼러 변신

아무리 이를 악물고 던져도 좀처럼 구위가 회복되지 않아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인저스의 오렐 허샤이저 투수코치가 너클볼 투수로 전향해보라고 제의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디키는 허샤이저 코치의 말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단 일주일 만에 너클볼 투수로 변신했다. 그러나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활약하던 팀 웨이크필드 외에는 너클볼 투수가 전무했기에 디키가 다시 메이저리그 무대에 오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였다.

2005년 너클볼 투수로 변신한 뒤 첫 번째 마이너리그 등판은 참담했다. 5.2이닝 동안 12안타를 맞으며 11실점이나 했다. 삼진은 1개도 잡지 못하고 볼넷은 5개나 허용했다. 디키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며 자책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눈물 젖은 빵을 씹으며 끊임없이 훈련에 몰두했다. 그해 9월 로스터 확장 때 다시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은 그는 LA 에인절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전설의 너클볼 투수 찰리 하우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눴다. 단 10분의 만남이었지만, 너클볼 그립을 새롭게 전수받을 수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06년 메이저리그에서 시즌을 출발했으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4월 7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홈경기에 등판한 디키는 3.1이닝 동안 홈런을 무려 6방이나 허용하며 7실점했다.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고 등판한 마지막 경기가 됐다. 이후 디키는 2008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5승8패, 2009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1승1패를 기록했을 뿐 나머지 시간은 마이너리그에서 보냈다.

○오뚝이 정신으로 사이영상 투수로 도약

팬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질 무렵인 2010년 뉴욕 메츠와 계약을 체결한 디키는 5월부터 선발로테이션에 합류해 그동안 갈고 닦은 마구를 마음껏 뿌려대며 11승9패, 방어율 2.84를 기록했다. 생애 최고의 시즌이었다. 2011년에는 시즌 초반 부진을 딛고 8승13패, 방어율 3.28의 성적을 올렸다. 무엇보다 빅리그에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200이닝을 돌파해 ‘이닝 이터’의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

그리고 메츠의 에이스로서 맞은 2012년 233.2이닝을 던져 20승6패, 방어율 2.73의 놀라운 성적을 올리면서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감격을 누렸다. 너클볼 투수로는 최초의 사이영상 수상이었다. 삼진을 230개나 잡는 동안 볼넷은 54개에 그칠 정도로 제구력이 한층 향상됐다. 다른 너클볼 투수와는 달리 디키는 시속 80마일(129km) 초반의 빠른 볼을 던진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시속 50마일(80km)대 후반의 아주 느린 너클볼 다음에 들어오는 80마일짜리 볼은 타자들에게 시속 100마일(161km)짜리로 느껴질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다. 토론토가 이제 곧 불혹이 되는 디키에게 2500만달러를 안긴 데는 이유가 있다. 메츠에 합류한 이후 인터리그 경기에서 5승무패, 방어율 1.72로 아메리칸리그 타자들에게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없는 결함을 딛고 37번이나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갔던 디키. 참담했던 2006시즌을 마치고 난 뒤 트리플A 내시빌 사운즈에서 유일하게 입단 제안을 받은 그는 아내에게 “당신이 원한다면 당장 야구를 그만둘 수 있다”고 말했다. 남편의 풀 죽은 모습을 본 아내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후회하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해 디키는 13승6패의 성적으로 트리플A 퍼시픽코스트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올라 훗날 메이저리그로 복귀할 발판을 마련했다. 현명한 아내의 내조와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오뚝이 정신이 없었더라면 너클볼을 던지는 사이영상 투수는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포츠동아 미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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