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 기자가 간다] 마음만 하이킥, 차는 足足 로킥…

  • 입력 2008년 9월 24일 09시 07분


“한국인은 모두 태권도를 잘 한다던데 사실입니까?”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태권도가 4개의 금메달을 따내자 중국 <난통일보>의 황카이 기자가 물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어릴 적부터 도장에서 태권도를 접한다”고 하자 황 기자는 놀랐다. 황 기자는 “몇몇 외국인들은 한국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한국인은 모두 날랜 발차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든 중국인이 황비홍은 아니지 않느냐?”고 답하자 황 기자도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면 당신은 태권도를 잘 하느냐?”는 물음에 잠시 주춤했다. 문득 노란 띠를 파랗게, 파란 띠를 빨갛게 물들일 꿈을 꾸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발차기는 자신 있다”는 당시 거짓말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삼성에스원 김세혁(54) 감독을 졸랐다. ‘당신 몸매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황 기자에게 날린 마지막 말은 “훙진바오(홍금보)도 있지 않느냐?”였다.

○ 태권도(跆拳道)의 핵심은 도(道)

죽전에 위치한 삼성휴먼센터. 시드니올림픽 김경훈(33), 이선희(30), 아테네올림픽 문대성(32), 장지원(29). 그리고 베이징올림픽 손태진(20)까지. 무려 5명의 금메달리스트가 삼성에스원의 유니폼을 입었다. 선수들은 선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김 코치, 다리 풀리게 해드려.” 김세혁 감독의 호령에 김용수(42) 코치가 미소를 지었다. 손태진이 자신의 도복과 검은 띠를 건넸다. “양말을 벗으셔야죠.” 주장 최성호(27)의 압박. “매트 위에서는 태권도화를 신거나, 맨발로 서는 것이 예의”라고 했다. 태권도화는 발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실전에서는 착용이 금지돼 있다. 몇몇 선수들은 연습 중에도 맨발을 드러낸다.

태권도(跆拳道)라는 말은 발(跆)과 주먹(拳), 그리고 도(道)를 뜻한다. 김세혁 감독은 “특히, 어린 선수들에게는 도(道)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상대방에 대한 예절을 차리지 못하면 발과 주먹을 쓸 자격이 없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심판의 안면을 발로 찬 앙헬 발로디아 마토스(쿠바)는 도를 몰랐다. 김 감독은 “태권도의 정신까지도 전파했어야 하는데 쿠바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며 개탄했다. 본격적인 훈련 이전, 정신교육에도 많은 시간이 할애됐다. 도복을 입을 자격에 대해 가르침. 그것만으로도 태권도의 흰 도복처럼 마음이 깨끗해졌다.

○ 뱁새, 황새따라하기

9월16일, 추석연휴 후 첫 훈련. 손태진도 행사들에 쫓기다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세혁 감독은 “정상에 있는 선수들은 쉬는 동안에도 최소한의 몸은 만들어 둔다”고 했다.

훈련의 시작은 스트레칭. 첫 번째 과제는 소위 ‘다리 찢기’다. 김용수 코치는 “골반이 유연해야 발차기를 잘 한다”고 했다. 4년 전 문대성(190cm)이 자기보다 큰 알렉산드로스 니콜라이디스(201cm·그리스)의 얼굴을 가격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유연한 골반 덕분.

‘뱁새가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이 딱 어울렸다. 발레리나처럼 일자로 다리를 뻗는 선수들. 90도를 넘지 못하는 다리각도에 선수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쓰러웠는지 최성호와 송지훈(24)이 다가왔다. 최성호가 기자의 다리를 벌리고, 손을 앞으로 당기면 송지훈이 기자의 등에 앉아 체중을 싣는다. 노래진 하늘, 고개를 숙이자 땅도 노랗다. “이제, 그만!”

선수들은 모두 ‘다리 찢기’에 대한 추억을 품고 있었다. 그들도 똑같은 고통을 겪었기에 ‘붕붕’ 양 다리를 벌리며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수들의 결론은 하나, “고통을 줄이려면 최대한 빨리, 몸이 유연할 때 태권도를 시작해야한다”는 것. 단, “그래도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다.”

○ 기합소리 만큼은 지지 않았다

드디어 발차기 훈련 시작. 일렬로 선다. 맨 앞에 있는 선수가 동료들의 손바닥에 발차기를 한 뒤, 다시 맨 뒤로 간다. 마치 손과 발이 만나는 하이파이브 같다. 두 번째, 세 번째 선수도 같은 동작을 따라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하이퍼텍스트구조, 이곳은 크레타 섬의 미궁이다. 선수는 14명 뿐이지만 끝이 없고, 빠져나올 수도 없다.

이번에는 왼발. 새가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듯 선수들도 양발사용이 자유로워야 좋은 경기를 펼친다. 하지만 오른발잡이 일반인은 왼발의 유연성이 떨어지게 마련. 가슴 높이에도 닿지 못할 만큼 왼발은 처져간다.

다음은 소(小)미트훈련. 2개의 미트를 양 손에 잡고, 3명의 선수가 짝을 지어 하는 발차기 훈련이다. 파트너는 김보혜(23)와 이성혜(24). 나래차기, 돌려차기 등 각각의 공격옵션에 따라 미트의 위치가 다르다. 미트를 제대로 잡아주어야 발차기를 정확히 할 수 있지만 초심자는 갈팡질팡. 보다 못한 박만성(41) 코치가 미트를 빼앗았다.

대(大)미트훈련. 몸통만한 미트를 가지고 일대일로 발차기를 주고받는다. 파트너는 손태진. “다리로 찬다고 생각하지 말고, 무릎을 올린다는 기분으로 차세요.” 금메달리스트의 지도에도 폼은 나오지 않았다. 김세혁 감독이 직접 나섰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김 감독의 발차기는 날쌨다. 발등이 미트에 꽂히는 소리가 체육관에 울렸다.

“이제, 뒤돌려차기입니다. 미트 꽉 잡으세요.” 손태진의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도는 순간, 온 몸에 묵직한 충격이 전달됐다. 박만성 코치는 “뒤돌려차기의 충격은 주먹의 7배 이상”이라고 했다. “억”소리조차 나지 않는 상황.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주고, 기합소리를 크게 냈다. 덩달아 손태진의 기합도 커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기합소리 하나는 우렁차고 좋으시네.” 김용수 코치의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

손태진이 특대사이즈 호구를 가져왔다. 겨루기다. 상대가 될 수 없는 터라 딱 한대씩만 주고받기로 했다. 대신 손태진은 몸통수비 금지. 손태진의 발이 들어오는 순간, 본능적으로 앞다리를 사용해 손태진의 무릎을 막았다. 일명 ‘커트발.’ 미국의 로페스가문 선수들이 즐겨 쓰는 반칙기술. 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위험이 크다.

마크 로페스와의 베이징올림픽 결승처럼 손태진은 반칙을 뚫고 발차기를 날렸다. 머리에 손태진의 발이 닿는 순간,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역시 헤드기어는 꼭 필요하다. 손태진은 “힘 다 빼고 찼다”며 너스레.

올림픽결승에서 종료직전 날렸던 돌려차기의 느낌이 궁금했다. “딱 한대만 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망설이던 손태진에게 김세혁 감독이 용기를 줬다. “딱 30% 정도로만 해드려.” 김 감독은 “(손)태진이가 그 발차기 한 방으로 인생을 바꿨다”며 웃었다. “내 인생 다 걸고 찼다”던 손태진의 발차기는 한국태권도의 역사도 바꿨다. 남자68kg급 올림픽금메달은 사상 처음이었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관련기사]‘올림픽 金5개 조련’ 김세혁감독 “마음은 벌써 런던에”

[관련기사]붕!붕! 선풍기 스매싱 “용대야 시원하지?”

[관련기사]이판사판 덤볐다 판판이 한판패!…유도체험기

[관련기사]예비역 스나이퍼 “사격복이 기가막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