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을용선수,백혈병투병 어린이찾아 축구공-유니폼 선물

  • 입력 2002년 7월 9일 21시 55분


이승호군을 찾은 이을용 선수(오른쪽) - 천안=안철민기자
이승호군을 찾은 이을용 선수(오른쪽) - 천안=안철민기자
9일 충남 천안시 안서동 단국대병원 중환자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이승호(李承鎬·9)군은 가장 좋아하는 월드컵 스타 이을용(李乙龍·27·부천SK) 선수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말없이 한참을 올려다보던 승호군은 이 선수가 손을 내밀자 그제서야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민둥머리에 마스크로 입을 가린 승호군은 이 선수가 사인한 축구공과 유니폼을 건네주자 이내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어머니 조미정씨(31)는 “승호가 지난달 22일 항암주사를 맞은 뒤 매우 힘들어했는데 오랜만에 웃는 모습을 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불우한 가정 환경을 딛고 이번 월드컵에서 빛나는 활약을 펼친 이 선수는 최근 승호군이 자신을 만나보는 게 소원이라는 얘기를 전해듣고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날 모든 스케줄을 제쳐놓고 충남 천안시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승호군이 백혈병에 걸린 사실을 안 것은 지난해 1월. 잦은 감기와 체력 저하에 시달리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 평범한 회사원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투병 중인 할아버지 등 다섯 식구에게는 날벼락 같은 선고였다.

승호군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골수이식.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승호군 가족은 승호군에게 맞는 골수를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다행히 골수은행을 통해 지난해 7월 골수조직이 같은 2명을 찾아냈지만 한 명은 골수 공여를 거부했고 다른 한 명은 골수를 이식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승호군 부모는 국내를 포기하고 일본과 대만에서 골수 공여자를 찾기 위해 어렵게 검사비를 마련해 해외로 송금까지 했으나 이마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승호군 부모는 승호군의 동생을 임신하는 데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골수가 아니더라도 탯줄 혈액(제대혈)에서 채취할 수 있는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면 승호군을 살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다행히 임신에 성공했고 2월 여동생 채린이가 태어났다. 그동안 2500만원짜리 전셋집은 단칸 월셋방으로 바뀌었고 엄마는 채린이와 외가에서, 아빠는 승호군과 함께 병원에서 기거하는 등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마지막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제대혈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메디포스트㈜의 도움을 받아 채린이의 탯줄에서 조혈모세포를 채취한 결과 기적적으로 승호군의 골수조직과 6가지 항원 모두 일치했기 때문.

승호군은 이달 말 서울아산병원에서 제대혈 이식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골수 이식수술과는 달리 의료보험 적용이 안 돼 1억여원의 치료비가 막막하기는 하지만 승호군이 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에 승호군 부모는 잠 못 이루며 하루하루 수술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

“어서 나아. 아저씨 다음에 또 올게.”

이 선수가 승호군과 눈을 맞췄다.

“빨리 나아서 아저씨 보러 운동장에 갈게요.”

승호군은 축구공을 가슴에 안고 병실을 나서는 이 선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 훈기자 dreamland@donga.com

천안〓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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