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축구 ‘세계화’로 기적 일궜다… 본선진출두번만에 16강 쾌거

  • 입력 2002년 6월 14일 18시 39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축구에서 일본이 당시 세계 최강이자 우승후보였던 브라질을 꺾었을 때 세계는 일순 놀랐다. 94미국월드컵 우승 때의 선수까지 포함된 브라질이 23세 이하 선수로 구성된 일본의 ‘2군’ 팀에 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않았기 때문. 그러나 대개 ‘일본이 이겼다’는 점에 비중을 두지 않고 ‘브라질이 왜 졌나’에 주목했다. 즉 일본축구의 질적 비약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일본인의 가공할 집중력과 단결력’을 승인으로 꼽았다. 과연 그랬을까.

6년 뒤 일본 축구대표팀은 월드컵 두 번째 도전 만에 첫승에 이어 16강 진출의 꿈을 실현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축구의 벽을 넘어서지 못해 아시아지역 월드컵 예선조차 통과한 적이 없어 ‘일본인한테는 축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왔던 터라 기적이라고 까지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96년 브라질 격파와 마찬가지로 프로축구 J리그의 출범과 더불어 진행된 세계 유수의 선수 영입, 나카타 히데토시를 비롯한 해외파의 활약, 유소년 팀의 체계적인 양성, 축구팬의 적극적인 성원, 필리프 트루시에 감독의 영입 등 10여년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얻어진 결실일 따름이다. 96년 브라질 격파는 이미 일본축구가 아시아권을 벗어나 세계 무대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

일본축구에 극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92년 프로축구팀이 ‘야마자키 나비스코컵’ 이름으로 발족해 93년 5월 리그전에 돌입한 일이다. 그로부터 4년 뒤 96년 브라질 격파로 일본에는 일약 축구붐이 일어났고 축구는 이제 야구와 배구에 이어 메이저 스포츠로 성장했다.

팬들의 성원은 축구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2001년 프로축구 J리그 1부리그 경기 관중은 총 397만1415명으로 경기당 평균 1만6548명이나 됐다. 93년 이후 2001년까지 J리그 1부 경기의 총 관중은 3362만여명으로 J리그 출범 이전의 ‘일본리그’전 시절 27년간의 관중수 973만명의 3배에 해당했다.

J리그 출범 이후 브라질의 용병 지코 등 세계 일류 선수들의 경기에 자극받아 활성화된 일본 축구는 96년 브라질팀 제압에 이어 97년 가을 이란을 꺾고 대망의 첫 월드컵 출전권을 따냈다. 그렇지만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기대와 성원에도 불구하고 3전 전패를 기록하고 패퇴하자 일본축구계는 프랑스 출신 트루시에 감독을 영입했다. 일본은 이미 아시아 축구 무대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세계 무대로 눈을 돌렸다.

98년 9월 감독에 취임한 트루시에는 가장 먼저 일본축구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관료주의’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반발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선수단 운영에 관해 감독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무려 10단계 이상의 절차를 밟아야 했던 것을 축구협회장과 핫라인을 만들어 해결하게 됐다. 98년 취임 후 월드컵 개막 직전인 5월25일 스웨덴국가대표팀과의 경기까지 A매치 통산 50전22승11패17무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트루시에 감독은 문화적 차이와 훈련방법에 대한 견해차 등 때문에 생긴 오해로 ‘언론과의 전쟁’을 겪었다. 특히 2001년 3월 프랑스팀에 0-5로 참패한 뒤에는 집중포화를 맞아 경질론이 거셌지만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이를 견디어냈다.

그리고 2002년 6월. 4년 전 프랑스월드컵 예선 탈락의 아픔 속에서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떠났던 나카타 히데토시, 오노 신지, 이나모토 준이치 등을 불러들이고 해외 활동을 통해 ‘세계 무대에 통하는 축구’의 감각을 익힌 나나미 히로시, 조 쇼지, 니시자와 아키노리 등을 주축으로 대표팀을 구성한 트루시에 감독은 월드컵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루었다.

오사카〓조헌주기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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