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발암물질 70종중 8종만 표기… 성분 공개법안 11년째 표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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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이제는 OUT!]〈1〉 부실한 ‘담배 유해성분’ 공개 제도

담뱃값 뒷면에 벤젠과 니켈 등 유해 성분 6종이 적혀 있다(왼쪽 사진). 담배에 아무리 많은 유해 성분이 들어 있어도 현행법상 담뱃갑에 표시해야 하는 건 이 6종과 니코틴, 타르뿐이다. 반면 한 미백 크림 뒷면에는 ‘화장품 전성분 표시제’에 따라 제조에 사용된 성분 47종이 모두 적혀 있다(오른쪽 사진).
#1.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화장품 가게. ‘판매량 1위’라고 적힌 미백 크림을 집어 들어 포장지 뒷면을 살피니 글자가 빼곡했다. 녹차추출물과 오렌지껍질오일 등 크림을 만들 때 사용한 성분 47종의 이름이 모두 표기돼 있었다. 옆에 진열된 한 마스크팩 상자에는 성분명이 53개나 적혀 있었다.

회사원 김재희 씨(37)는 화장품을 고를 때 이런 성분명을 꼼꼼하게 살핀다. 생소한 성분명이 있으면 화장품 정보 애플리케이션(앱)이나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본다. 김 씨는 “매일 쓰는 화장품인 만큼 피부 문제를 일으키는 성분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2.같은 날 바로 옆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A사’ 담뱃갑에는 글자가 별로 없었다. 적혀 있는 성분은 타르와 니코틴 등 8종뿐이었다. 포장지만 보면 마치 화장품보다 화학물질이 덜한 걸로 착각할 만하다. 하지만 이 담배에선 포름알데히드와 아세트알데히드, 벤조피렌 등 국제암연구소(IARC)가 발암물질로 분류한 성분을 포함해 총 28종의 유해 성분이 검출됐다. 2017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검사한 결과다. 대다수 흡연자는 이 사실을 모른다.

● 15년째 ‘담뱃갑에 발암물질 8종만 표기’

국내법상 담뱃갑에 표시해야 하는 성분은 니코틴과 타르, 비소, 벤젠, 니켈, 카드뮴, 나프틸아민, 비닐 클로라이드 등 8종뿐이다. 원래 담배사업법에 따라 니코틴과 타르만 표시하던 걸 2008년 12월 개정 국민건강증진법 시행 이후 8종으로 확대했다. 담배에 포함된 유해 성분은 이보다 훨씬 많지만 인체 영향이 큰 물질부터 우선 표시하자는 취지였는데, 15년째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다른 성분은 정부가 관련 자료를 요구해도 담배 회사가 제출할 의무가 없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담배에 포함된 발암물질은 최소 70종이다.

액상형 전자담배는 더욱 허술해 니코틴 용액의 용량만 표기하면 된다. 현행 담배사업법상 담뱃잎이 아닌 담배의 줄기나 뿌리로 만든 니코틴 용액은 성분을 표시하지 않아도 제재할 근거가 없어서다.

반면 화장품은 2008년 시행된 ‘전성분 표시제’에 따라 제조에 사용된 성분을 제품 겉면에 모두 적어야 한다. 클렌징폼처럼 거품을 낸 뒤 곧장 물로 씻어내는 제품이나 하루 한두 번만 사용하는 샴푸 등도 예외가 아니다. 덕분에 소비자들이 화학물질을 무분별하게 사용한 제품을 걸러낼 수 있다.

● 국내 소비자만 담배 성분 모르고 피워

해외에서는 이미 전자담배를 포함해 모든 담배에 들어간 성분을 공개하는 제도가 정착했다. 미국은 2009년 ‘흡연 예방 및 담배규제법’을 시행해 담배를 만들 때 사용한 모든 재료와 성분의 목록을 정부에 제출하도록 한다. 더 나아가 담배를 피울 때 발생하는 연기에 담긴 유해 성분까지 공인 기관에서 검사해 그 목록과 함유량까지 내야 한다.

이 내용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담배 회사가 스스로 자사 홈페이지에 이를 공개하기도 한다. 유럽연합(EU)과 영국, 캐나다, 호주 등도 비슷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담배 회사들이 똑같은 담배를 팔아도 한국어 홈페이지에서만 성분을 감춘다. B사는 미국 소비자를 위한 홈페이지에는 담배 제품별로 유해 성분의 종류와 함유량을 상세히 공개하고 있지만 한국어 홈페이지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국내에서는 담배에 포함된 유해 성분의 종류와 양을 공개하는 법안이 9년여간 12건이나 발의됐지만 국회 본회의에 오른 적이 없다. 2013년 12월 제19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관련법은 국회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제20대 국회에선 관련 법안 3건이 법제사법위원회에 올랐지만 ‘법안의 무덤’이라 불리는 법안심사제2소위원회(법안소위)로 넘어간 이후 결국 폐기됐다.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 가운데 누가 담배 성분을 관리할지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담배 회사의 반발에 국회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번 제21대 국회에선 관련 법안이 6건이나 발의됐다. 상황은 4년 전과 비슷하다. 현재 복지부와 식약처 소관의 ‘담배의 유해성 관리법 제정안’은 법사위에, 기재부 소관의 ‘담배사업법 개정안’은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에 올라와 있다. 그간 담배 산업 육성과 과세는 기재부가, 금연 정책 등 담배 규제는 복지부가 각각 담당해 왔다. 기재부가 담당하는 담배사업법은 제정 목적에 “담배 산업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한다”고 명기돼 있다.

이 때문에 담배 유해 성분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는 게 복지부의 시각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담배 성분 관리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전문성을 갖춘 보건 부처가 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기재부는 “담배 관련 규제는 (기재부 담당으로) 일원화하는 게 오해의 소지가 적다”는 입장이다. 이성규 한국담배규제연구교육센터장은 “부처와 국회 내부 논의가 길어지는 동안 웃는 건 담배 회사이고, 피해를 보는 건 국민이다”라며 “성분 공개를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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