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후지산 바라보며 야간 레이스… 한라산 둘레길처럼 내달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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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임재영 기자, 일본 후지산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 참가 르포
3년만에 30개국 2387명 참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기 반복
20분 쪽잠 자면서 43시간 레이스, 마지막 힘 다해서 완주에 성공

21일 일본 후지산 울트라 트레일러닝(UTMF)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관중의 응원을 받으며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후지=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21일 일본 후지산 울트라 트레일러닝(UTMF)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관중의 응원을 받으며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후지=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23일 오전 10시23분18초. 일본 야마나시(山梨)현 후지요시다(富士吉田)시 후지큐하일랜드에 마련된 결승선을 밟는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와”라는 함성이 저절로 나왔다. 후지산 울트라 트레일러닝(UTMF) 165km 대회의 대장정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다리 근육의 고통은 금세 사라지고 희열로 충만했다. ‘불가능할 것 같은 레이스를 해냈다’는 생각이 들면서 성취감과 자존감이 수직 상승했다. 기자의 기록은 43시간8분18초로 제한시간 44시간15분을 불과 1시간가량 남기고 가까스로 완주했다.

트레일러닝은 도로를 달리는 마라톤과는 달리 산과 숲, 하천 등을 뛰고 달리는 스포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회는 통상적으로 100km 이상을 코스로 정해 울트라 대회로 운영하고 있다.

임재영 기자가 일본 후지산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를 완주하고 난 뒤 결승선에서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재영 기자가 일본 후지산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를 완주하고 난 뒤 결승선에서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다.
UTMF는 2012년 출범한 이후 세계 10대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의 하나이자 아시아를 대표하는 대회로 성장했다. 2020년부터 3년 동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열리지 못하다가 이번에 30개국 2387명(남 2055명, 여 332명)이 참가한 가운데 정상적으로 개최됐다. 한국에서는 기자를 포함해 14명이 도전장을 냈다.


● 고난의 레이스 후지산 울트라 트레일러닝


출발 지점은 시즈오카(静岡)현 후지(富士)시 후지산 어린이나라공원. 21일 오후 2시 반부터 4개 그룹으로 나눠 출발했다. 기자는 하위권인 4그룹에 속해 오후 3시 15분에 달리기 시작했다. 첫 구간은 23km의 높낮이가 완만한 구간으로 정면에 눈이 여전히 쌓여 있는 후지산(해발 3776m)이 한눈에 들어왔다. 웅장한 후지산 장관은 10여 분 만에 구름으로 덮였다.

편백나무와 삼나무 숲 사이로 천남성 새순이 돋아났고 고사리, 줄딸기, 산수국, 뽀리뱅이, 초피나무 등 제주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야생 식물이 보였다. 마치 한라산 둘레길을 달리는 듯했다. 첫 번째 구호소(Aid Station)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보충하고, 빵으로 간단히 허기를 채운 뒤 헤드랜턴을 꺼내 야간 레이스에 돌입했다.

구호소는 모두 9곳에 설치됐는데 치료, 구급구조의 역할과 함께 식음료를 제공한다. 구호소 도착 제한시간을 넘긴 선수를 통제하기도 한다. 다음 구호소까지 구간이 가장 험난하다. 27km로 가장 높은 곳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을 지나친 듯싶더니 내리막 뒤에 또다시 급경사 오르막이 수차례 나타났다. 내리막 역시 가팔랐다. 흙 위로 노출된 나무뿌리에 걸리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곡(哭)소리’가 절로 나왔다. 신생대부터 시작된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지대이다 보니 흙 깊이가 얕아 나무들이 뿌리를 옆으로 뻗은 탓이다.

98km 지점의 구호소에 도착하자 졸음이 쏟아졌다. 실력이 우수한 선수들은 미리 도착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기자처럼 아마추어 레이서는 제한시간에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휴식조차 편하지 않다. 당초 50분가량 토막잠을 잘 예정이었으나 일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20분 정도 쪽잠을 자고 다시 레이스에 나섰다. 이때부터 주로(走路) 주변에서 잠을 견디지 못해 노숙하는 선수들이 보였다.

두 번째 맞이한 야간 레이스에서 위험도가 급상승했다. 자칫 발을 잘못 내디디면 계곡으로 추락할 수 있는 낭떠러지 구간이 자주 나타났다. 추월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선수들이 한 명씩 올라야 하는 암벽 등산 구간도 세 군데가 있었다. 호수에서 올라오는 냉랭한 바람은 손과 얼굴을 얼게 만들었다. 당초 예보처럼 비가 내렸다면 고통은 더욱 컸을 텐데 비가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또다시 아침을 맞이하면서 끝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졸음과 다리를 짓누르는 통증은 더해졌다. 졸음을 참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 눈을 뜬 탓인지 양쪽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앞서가는 선수가 두 사람으로 보였다. 좁은 능선 구간에서는 신경이 곤두섰다. 졸음을 견디며 시내로 진입하자 지역 주민, 선수 가족, 행사 관계자의 응원이 커다란 힘이 됐다. 남아 있지 않을 듯했던 마지막 힘을 다해서 결국 완주에 성공했다.

● 아시아 대표 트레일러닝 대회


트레일러닝 대회의 난도를 분석할 때는 거리와 함께 누적 상승고도를 감안한다. 누적 상승고도는 코스의 오르막 높이를 합친 고도를 말한다. 이 대회 거리는 165km, 누적 상승고도는 6500m이다. 지리산 화엄사∼벽소령∼천왕봉∼대원사 구간을 일컫는 ‘화대종주’ 거리가 45km, 누적 상승고도 3300m인 점을 감안하면 화대종주를 두 번 하고, 추가로 마라톤 풀코스(42km)와 하프코스(21km)를 뛰는 것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이 대회는 해발 500m에서 1600m가량에 포진한 후지산 둘레 산과 능선을 오르내리는 코스로, 일부는 교외 마을을 지나기도 한다. 편백나무와 삼나무, 비자나무 등이 자생하는 트레일 코스도 일부 포함한다. 제주지역 곶자왈(용암암괴에 형성된 숲)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숲도 보였다. 제주의 ‘숨골’로 불리는 곳이 일본에서는 수혈(水穴), 풍혈(風穴)로 쓰이는 듯했다. 후지산과 한라산 일대 모두 화산지대이기에 유사한 경관을 형성한 것이다.

등산로에서의 경관은 비슷비슷해서 차별성이 없었고, 고지대에서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는 경관 포인트가 드물었다. 국내외 1000km 초장거리 코스를 완주하는 한국산림복지진흥원 박석희 산림복지서비스본부장은 “대회 난도를 따진다면 상(上)급 수준으로 웬만한 체력이나 성급한 의욕만으로는 제한시간에 완주하기가 쉽지 않다”며 “세계적인 대회답게 참가 인원 실력이나 대회 운영이 좋았는데, 일부 암벽 구간에 안전요원이 배치되지 않은 점은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중국인 자오자쥐(趙家駒) 선수가 우승했으며 기록은 19시간35분24초이다. 한국에서 출전한 선수 가운데 가장 좋은 기록은 대우조선해양 계열사인 디섹에 근무하는 임정현 씨(37)다. 24시간9분44초로 23위를 차지했다. 50위권 선수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유일하다. 임 씨는 “회사를 다니면서 몸무게가 늘고 고지혈증도 생기면서 산에 올라 걷고 뛰기를 하다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트레일러닝에 빠졌다”며 “산을 넘으며 출퇴근한 것이 체력 강화와 기록 단축에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 참가자 가운데 완주자는 1687명으로, 완주율은 70.7%이다. 30%가량에 달하는 참가자가 중도에 포기했다. 이 대회는 2014년 울트라 트레일 월드투어(UTWT)가 처음 선정한 세계 10대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에 홍콩 100km와 더불어 아시아 지역 대표 대회로 포함됐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일본#후지산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임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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