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했어요, 도와주세요” 절박한 한 마디에 달려간다 [따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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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4월 20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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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들의 공간 ‘애란원’ 강영실 원장

애란원 제공.
애란원 제공.
강영실 애란원 원장. 애란원 제공.
강영실 애란원 원장. 애란원 제공.
“임신했는데 부모님이 낳지 말래요. 하지만 전 낳고 싶어요.”
“임신 중인데 남편이 절 때려요. 지금 거기로 가도 되나요?”

연간 평균 400통. 위기에 처해있는 미혼모들과 임신부들이 ‘애란원’으로 연락한다. 사연도 다양하다. 아이 아빠에게 버림받아 이곳을 찾는 미혼모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당하거나 가출, 노숙 생활을 하다 임신한 여성들이 도움을 요청한다. 심지어 “남편이 날 때린다”며 배를 움켜잡고 맨발로 집에서 도망 나온 임신부도 있다.

그렇게 1년에 100여 명의 엄마들이 애란원에서 1년에서 1년 6개월간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는 기본 숙식, 출산, 산후조리, 양육, 심리 상담, 그리고 출산 이후 엄마들의 자립을 위한 교육 등 모든 것을 지원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는 강영실 애란원 원장(63)의 손길이 닿아있다.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후 미혼모 상담‧아기 입양 등을 담당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식을 해외 입양 보내야 하는 현실에 처한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 “미혼모 70% 입양 후회…당시 사회가 ‘양육’ 기회 뺏은 것”
강 원장은 “1980~90년대에는 미혼모들이 자녀를 대부분 해외 입양을 보냈다, 미혼모를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 국내 입양은 거의 없었다”며 “아기 생일이 다가오면 나를 찾아오는 엄마들이 있었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1~2년 정도 자립할 도움을 주면 내가 애를 키웠을 것’이라고 하더라. 엄마들 70% 정도가 그렇게 말했다”고 말했다.

이어 “미혼모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속으로 좀 놀랐었다. 입양을 후회하며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엄마들이 안타깝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 사회가 이들의 ‘양육’ 기회를 뺏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며 “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애란원을 알게 됐다”고 했다.

1997년 애란원으로 온 강 원장(당시 사무국장)은 미혼모와 아이에 대한 턱없이 부족한 지원에 눈앞이 캄캄했다. 당시 애란원 역시 ‘미혼모’만 지원했지, 태어난 아기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 아이를 낳으면 지낼 공간과 산후조리는 할 수 있지만 아이의 분윳값, 기저귓값 등은 엄마의 몫이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애란원에 6개월 밖에 있지 못했다. 출산 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엄마들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입양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와 아이는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강 원장은 애란원이 미혼모의 자립과 아기 돌봄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적극 홍보했다. 그러자 미혼모들이 전국에서 애란원을 찾아왔다. 수용할 공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또한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후원과 관심은 미비해 지속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열매)의 도움을 받아 애란원 근처에 집을 구해 미혼모들과 아이를 돌볼 수 있었다. 집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주변에 대학교가 많아 하숙생들이 많았는데 아이가 울면 시끄러워 학생들이 하숙하지 않는다며 집을 내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애란원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키우게 된 엄마들은 그들의 바람대도 자립에 성공했다. 강 원장을 비롯한 여러 사회복지사 덕분에 미혼모들은 1~2년 동안 아기를 키우면서 학교 공부를 하거나 직업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이후 취업해 자립을 하면서 온전히 자신의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됐다.

이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 강 원장은 이런 선순환 구조를 지속시키기 위해 2002년 미혼모 지원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정부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서울시가 이를 의미 있게 받아들여 이듬해에 ‘애란 모자의집’을 마련해 엄마들이 취업해 자립할 수 있도록 적극 돕고 있다. 이후 전국에 걸쳐 미혼모들의 임신과 출산을 돕는 곳이 43개가 생겼다고 강 원장은 말했다.
애란원에는 아기를 보살필 수 있는 공간부터 엄마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애란원에는 아기를 보살필 수 있는 공간부터 엄마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 “공부하고 아이보고…엄마들 이 악물고 살아, 대견하고 기특하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이다. 학생으로, 사회인으로 살다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양육이냐 입양이냐 혹은 낙태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오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게 된다고 한다.

강 원장은 “출산 후 엄마들은 ‘자립’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해진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잠도 안 자고 공부한다”며 “밤에 학습실에 가보면 자격증 시험이나 검정고시 등을 준비하려 눈이 빠지게 공부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기들 돌잔치를 할 때면 1년간 고생했을 엄마들의 모습에 울컥해지기도 한다. 힘든 시간을 거쳐 아이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산 이들의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며 “내가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미혼모 공동생활가정 ‘애란세움터’에 있는 김하영(가명‧24) 씨는 “2017년에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과 떨어져 길거리 생활을 하던 중 애란원을 알게 됐다”며 “아이 출산 후 자립을 위해 간호조무사를 준비했는데 계속된 불합격에 앞으로 어떻게 아이를 양육할 수 있을지 걱정됐지만 애란원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상담과 치료를 받으며 불안함을 떨쳐낼 수 있었고 함께 지내는 언니들 옆에서 즐겁게 생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세움터에 온 지 3년이 지났는데 이제는 자립할 수 있게 됐다”며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기다리고 있다. 애란원 선생님들과, 내 아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강영실 애란원 원장. 애란원 제공.
강영실 애란원 원장. 애란원 제공.


● “사각지대에 있는 위기의 엄마들 보호해야”
이미 수많은 엄마와 아기들을 보호하고 있는 강 원장은 정부와 사회가 미혼모뿐만 아니라 ‘사각지대’에 있는 위기의 임신부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사각지대’란 기혼 상태이지만 배우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기본 생활이 어려운 경우, 신체‧정신‧지적장애가 있는 경우, 미등록 외국인으로 아이 출생신고를 못 하는 경우 등을 뜻한다.

민간에서는 이미 이런 위기에 처해있는 임신출산여성을 위한 곳이 있다. ‘한국 위기임신출산센터’로 전화 ‘1422-37’로 연락하면 비공개 상담을 비롯해 엄마들의 임신과 출산을 안전하게 돕는다.

강 원장은 “계획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을 했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위기에 처한 엄마들이 낙태하거나 심지어 출산 후 아기를 유기 혹은 살해, 매매 등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다”며 “아직 이들을 위한 법과 정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이슈에 대해 민간뿐 아니라 정부와 지역사회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원장은 리투아니아에서 온 한 여성(30대)을 예로 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 불법 외국인 노동자로 들어와 일을 하다가 한국 남자를 만나 임신을 하게 됐다. 그러나 아기 아빠는 무책임하게 도망가 버렸고, 아기를 포기할까 고민하던 그는 이주여성 쉼터의 연계로 ‘1422-37’ 센터와 연락돼 출산을 했다. 홀로 아기를 책임져야 했던 이 여성은 출산 후 무리하게 일을 했고 혈전으로 인해 심장마비가 와 사망했다. 절반은 한국인인 아기는 외할아버지가 입국해 리투아니아로 데려갔다.

그는 “미등록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발각되면 본국으로 쫓겨나는 상황이라 병원도 제대로 못 갔다”며 “이 사람뿐이겠나, 이 세상 바깥에는 사각지대에 숨겨져 보호받지 못하는 엄마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이들을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 원장은 자신이 애란원에 있는 마지막 날까지 어려움에 처한 임신‧출산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혹시나 지금도 여러 고민 중인 엄마들이 있다면 우리가 아니더라도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았으면 좋겠다”며 “지금은 절망 가운데 있는 것 같을 수도 있지만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일 수 있다. 곁에 누군가는 꼭 있다”고 말했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조유경 동아닷컴 기자 polaris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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