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시간 최장 산불속 쪽잠 사투… 8만그루 금강송 지켜 뿌듯”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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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꺾이지 않은 마음]〈5·끝〉산림청 산불재난특수진화대
영하의 날씨에 20kg 호스 들쳐메고 두세차례 산 올라 쉬지 않고 물뿌려
격무-박봉에도 꺾임없이 버티는 건 동료들과 산 지킨다는 자부심 덕분

남부지방산림청 산불재난특수진화대 권호갑 대원(왼쪽)과 김익태 대원이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에서 주먹을 쥔 채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들은 올 3월 추위 속에서 밤낮없이 물을 뿌리며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대왕소나무(수령 500년 이상)와 
금강송 군락지를 사수했다. 울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남부지방산림청 산불재난특수진화대 권호갑 대원(왼쪽)과 김익태 대원이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에서 주먹을 쥔 채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들은 올 3월 추위 속에서 밤낮없이 물을 뿌리며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대왕소나무(수령 500년 이상)와 금강송 군락지를 사수했다. 울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올 3월 9일. 닷새 전 시작된 불길은 바싹 마른 숲을 먹잇감 삼아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의 산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진화 작전을 이어오던 남부지방산림청 산불재난특수진화대(특수진화대) 대원들은 탈진 직전이었다.

그런데 바람 방향이 바뀌면서 동해안 쪽으로 진군하던 산불이 갑자기 울진 금강송면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대왕소나무(수령 500년 이상)를 비롯해 200년 이상 된 소나무 8만5000여 그루가 잿더미가 될 판이었다. 기진맥진한 대원들에게 산불현장통제지휘본부로부터 ‘군락지로 이동해 방화선을 치라’는 긴급 무전이 날아왔다.

총 13명의 진화대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기합을 넣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금강송면 안일왕산(해발 819m)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불길은 군락지 핵심 지역에서 불과 300m 떨어진 지점에서 혀를 날름거렸다. 이달 28일 금강송 군락지에서 만난 특수진화대 김익태 대원(51)은 “마른 낙엽이 잔뜩 쌓여 있는데 바람이 워낙 강해 불붙은 솔방울 등이 수십∼수백 m까지도 날아가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 강추위 속 화마와 싸우며 지킨 대왕소나무
대원들은 저지선을 만들기 위해 1.2km 떨어진 산 정상까지 각자 20kg짜리 호스를 들쳐 메고 두세 차례 산을 오르내렸다. 50∼100m 길이인 호스 10여 개를 이어야 산 정상에서 물을 쏴 저지선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산속은 영하의 날씨인데 칼바람까지 몰아쳤다. 김 대원은 “수천 개의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래도 금강송 군락지를 지켜야 했다. 함께 만난 특수진화대 권호갑 대원(46)은 “산속에선 3월에도 10분 안에 물이 언다. 호스 안에서 물이 얼어붙으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2박 3일간 동료들이 교대하며 한시도 쉬지 않고 물을 뿌렸다”고 말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지속된 진화 작전에 몸이 휘청할 때마다 동료들을 보며 버텼다. 김 대원은 “동료들과 끝나면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자며 서로 용기를 북돋았다”고 말했다. 권 대원은 “말없이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료가 없었다면 못 버텼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마주한 산불은 213시간 43분 동안 산림을 태우며 1986년 산림청이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래 가장 오래 지속된 산불로 기록됐다. 불타 없어진 산림만 1만6300여 ha(헥타르)에 이른다. 그럼에도 대원들의 노력 덕분에 금강송 군락지 3700여 ha는 불타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소광리는 조선 숙종 때였던 1680년부터 왕실에서 쓸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의 출입을 금했던 국내 최대 금강송 군락지다. 2001년 경복궁 복원에도, 2008년 불에 탄 숭례문 복원에도 이곳에서 자란 금강송이 사용됐다.

권 대원은 기자와 인터뷰하던 중 대왕소나무를 올려다보며 “내 손으로 이렇게 큰 나무를 지켰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롭다”면서도 “일부 불타 없어져버린 나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고 했다.
○ 순식간에 번진 불길에 생명 위협도
특수진화대원이 되기 전까지 두 대원은 산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했다. 송전탑 관리 업무를 하던 김 대원은 고압선 교체 작업을 하다 부상을 입고 퇴직했다. 그는 “재활 목적으로 오르던 산이 점점 좋아져 2019년 특수진화대에 지원했다. 어머니 품속 같은 산에 매일 오를 수 있어 만족하며 일한다”며 웃었다.

권 대원은 자영업자였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매일같이 이어지는 술자리에 회의를 느껴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고 특수진화대원이 된 이유를 밝혔다. 그는 2020년 채용돼 3년 차 대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 울진 산불 때 김 대원은 수색 업무를 하다 순식간에 번진 불길에 갇혀 하마터면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다. 그는 “갑자기 바람 방향이 바뀌면서 불길이 확 뻗어왔다”며 “정신없이 도망쳐 나오는 동안 휴대전화와 무전기까지 잃어버렸다. 연기를 흡입해 정신을 잃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다”고 아찔했던 상황을 돌이켰다.
○ “새해에는 산불 없었으면”
목숨을 위협받은 순간은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무거운 호스를 계속 날라야 하다 보니 어깨, 무릎, 허리 등 관절마다 부상도 달고 산다. 하지만 산림청 소속 공무직인 이들은 기본급 250만 원과 식대 14만 원이 한 달 급여의 전부다. 위험수당이나 생명수당도 없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숲과 산을 지킨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이 이들의 발길을 옮기게 하는 원동력이다. 김 대원은 “울진·삼척 산불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언제 어디서든 출동해 초기 진화할 수 있는 체력과 정신 상태를 새해에도 유지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권 대원은 “산불은 위협적이지만 새해 정부와 지자체,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면 얼마든 이겨낼 수 있다”며 “국민들도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산불 예방에 동참해 달라”고 했다.


울진=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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