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텅 비고 쌀 다 떨어졌어요”…물폭탄 판자촌 구룡마을 시름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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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년 8월 12일 15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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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노옥숙씨가 집 밖을 내다보고 있다. 22.08.11/뉴스1
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노옥숙씨가 집 밖을 내다보고 있다. 22.08.11/뉴스1
“냉장고가 텅텅 비었어요. 쌀 좀 구해줄 수 있나요.”

11일 오전 9시쯤 서울 강남구의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에서 만난 노옥숙씨(77·여)가 냉장고 문을 닫으며 말했다. 구룡마을에서만 34년 지낸 노씨가 혼자 사는 집 냉장고에는 말라버린 쌀밥그릇과 절임반찬 몇 가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차로 10분 거리에 마련된 구룡중학교 임시대피소로 피신하지 못한 노씨는 홀로 남아 이틀 밤낮 집에 들어찬 빗물을 퍼냈다. 그는 “몸이 아프지 않았으면 나도 (대피소에) 갔을 것”이라며 “구룡마을에서 이사를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나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침수된 집 문턱 높이가 10㎝ 남짓했다. 22.08.11/뉴스1
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침수된 집 문턱 높이가 10㎝ 남짓했다. 22.08.11/뉴스1
노씨 집 내부 천장에는 50㎝ 크기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폭우가 내린 8일 밤마실을 다녀온 뒤 들어선 집은 구멍을 통해 쏟아진 빗물로 물바다가 돼 있었다.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울먹이던 노씨는 “집들이 붙어있다 보니 옆집 공사 이후 우리 집에 구멍이 생겼다”며 “구멍 아래에 둔 고무대야에 물이 차면 계속 퍼내야 한다”고 말했다.

구룡산 중턱에 걸린 산구름이 마을을 향해 내려오는 아침. 비가 내리는 동네는 길가까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골목 곳곳에 젖은 옷가지와 이불이 널려있었고 창고에 나란히 쌓아둔 까만 연탄들이 빗물에 부서져 무너진 모습도 보였다.

대피소에서 잠시 돌아온 동네 주민들은 흙탕물이 들이친 집에서 미처 챙겨 나오지 못한 생필품을 수습하느라 분주했다. 저마다 품에 가방과 상자를 한아름 안고 바쁘게 좁은 골목을 오갔다.

집을 청소 중이던 박모씨(63·여)는 “물건들을 손보려고 대피소에서 돌아왔다”며 “옷이고 이불이고 다 못 쓰게 됐다”고 푸념했다.

박씨 집은 8일 밤 바로 옆 개울물이 넘치면서 삽시간에 물바다가 됐다. 빗물은 불과 10㎝ 남짓한 문턱을 쉽게 넘어 들어와 남편과 함께 30년 넘게 거주한 삶의 터전을 어지럽혔다.

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주민이 침수된 집을 정리하고 있다. 22.08.11/뉴스1
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주민이 침수된 집을 정리하고 있다. 22.08.11/뉴스1
바닥에는 젖은 흙이 굳어 빗자루로 잘 쓸리지 않았다. 벽지에는 30㎝높이까지 누런 물 자국이 선명했다. 냉장고는 빗물에 고장이 나 안에 있던 음식도 모두 버려야 할 지경이었다.

이날 오전 구룡마을과 1㎞ 정도 떨어진 구룡중학교 2층 체육관에는 대피한 주민들이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4일까지 임시로 운영하는 이곳에는 이날 오전 9시 기준, 주민 88명이 머무르고 있다.

8일 밤 폭우로 마을이 침수되자 강남구청은 버스를 동원해 주민을 이곳으로 대피시켰다. 구룡마을 1~8지구에 거주 중인 약 550세대 가운데 빗물에 완전히 쓸려간 집은 10여채에 이른다.

구룡마을에서 30년 가까이 지낸 이모씨(60·여)는“ 내 인생이 거기 다 있다”며 “한번 발을 붙이고 나니까 다른 데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고 시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씨는 구룡마을에서 생활을 떠올리며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아냈다. 그는 “우리가 낮은 데 있다 보니 나서지를 못하겠다”고 말했다.

10일 서울 강남구 구룡중학교 체육관에 구룡마을 수해 이재민들이 임시대피소로 사용하는 텐트들이 설치돼 있다. 2022.8.10 사진공동취재단
10일 서울 강남구 구룡중학교 체육관에 구룡마을 수해 이재민들이 임시대피소로 사용하는 텐트들이 설치돼 있다. 2022.8.10 사진공동취재단
대피소에는 막사 69개와 매트리스가 설치됐다. 막사는 이날 15개를 추가로 설치할 예정이다. 주민들에게 지급된 남녀용 응급구호세트에는 수건, 담요, 양말, 세면도구, 베개, 화장지, 귀마개가 담겼다.

한인경씨(94·여)는 폭우가 내린 날 다급했던 탈출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집에 무릎까지 비가 들어와서 벽을 뚫어서 물을 퍼냈다”며 “내가 여기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구룡마을은 65세 이상 주민 비율이 70%가 넘는다. 집에서 식사 조리가 어려운 주민들은 대피소까지 걸어가 식사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임시대피소 잠자리가 불편하거나 코로나19 감염 우려가 높은 일부 주민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영만 구룡마을자치회장(61)은 “집이 완파나 반파돼서 복구에 시간이 걸리는 집은 구청 지원을 받아 인근 숙박업소로 이동할 예정”이라며 “오늘도 비가 내리는데 피해가 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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