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때 걸린 ‘범 내려온다’… 응원문구로 쓰면 안되는 이유[고양이 눈썹]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4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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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도쿄올림픽 한국선수촌에 걸린 플래카드. ‘범 내려온다’는 절대 응원 문구로 쓰면 안 됩니다. 동아일보DB
2022년 도쿄올림픽 한국선수촌에 걸린 플래카드. ‘범 내려온다’는 절대 응원 문구로 쓰면 안 됩니다. 동아일보DB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 같은 앞다리, 동아 같은 뒷발로양 귀 찌어지고,

쇠낫 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라 정신없이 목을 움추리고 가만이 엎졌것다”

2021년 8월
2021년 8월
판소리 ‘수궁가’에서 호랑이가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산 속 동물들이 자기 나이를 떠벌이며 서열을 정하느라 다투는 사이, 별주부가 토끼를 ‘토생원’이라고 부르려다 실수로 ‘호생원’이라 말하자 ‘생원’소리를 처음 들은 범이 반색하며 내려오는 장면이죠.

수궁가와 별주부전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지만, 세세한 에피소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2020년 크로스오버 밴드 ‘이날치’가 이 대목을 한국관광공사의 뮤직비디오로 알리며 유명해졌죠. 이 영상이 대박이 난 뒤 새로 뭔가 등장하면 ‘범 내려온다’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게임 체인저’를 기대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아래 문단을 보신다면 이 비유는 선뜻 쓰기가 어려워 질 것입니다.

이날치 뮤직비디오 캡쳐
이날치 뮤직비디오 캡쳐
▽별주부가 한 꾀를 얼른내고 목을 길게 빼어 호랭이 앞으로 바짝바짝 달려들며 “자! 목 나가오 목 나가!” “호랭이 깜짝 놀라 ”그만 나오시오 그만 나와! 이렇듯 나오다가는 하루 일천오백발도 더 나오겠소. 어찌 그리 조그마한 분이 목이 들랑달랑 뒤움치기를 잘 하시오“…(중략)…”호랑이 쓸개가 좋다 허기로 도량귀신 잡어타고 호랑이 사냥을 나왔으니 네가 일찍 호랑이냐 쓸개 한 봉 못 주겠나 도량귀신 게 있느냐 비수 검드는 칼로 이 호랑이 배 갈라라!“

호랭이 다리(주요부위)를 꽉 물고 뺑뺑 돌아노니 어찌 호랭이가 아팠던지 거기서 의주 압록강까지를 도망을 했겄다. 거기서 저 혼자 장담하는 말이 ”아따! 그놈 참 용맹 무서운 놈이로다. 나나 된 게 여기까지 살아왔지 다른 놈 같으면 영락없이 죽었을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호랑이는 납작 엎드린 자라를 보고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자라는 용기를 내 버티고, 꾀를 내 허풍을 떤 뒤 호랑이의 그 곳을 꽉 물자 호랑이가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수궁가에서 ‘범’은 허우대만 좋고 실속은 없는 캐릭터입니다. ‘범 내려온다’는 명예로운 비유가 아니라 치욕스런 표현에 더 가깝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트위터
국립중앙박물관 트위터

▽‘1만 시간의 법칙’도 내용의 절반만 인용되는 용어입니다.

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Outliers)’에 등장해 유명해진 개념지요. 책의 초·중반부 핵심 내용입니다. 자기계발서나 방송 교양 프로그램, 언론 칼럼에도 숱하게 인용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글래드웰이 하고 싶어 하는 주제는 책 후반부에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일반인들도 이미 자기 분야에서 1만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인데, 누구는 아웃라이어가 되고 누구는 왜 평범하는 사는가….

글래드웰은 그 이유를 ‘운’과 ‘환경’으로 꼽습니다. 개인이 처한 상황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1950년대에 태어난 아프리카 아이는 전자제품은 구경도 못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미국 시애틀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빌 게이츠는 10대에 당대의 슈퍼컴퓨터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개인 능력과 노력 이외에도 가정 환경(부모), 사회 배경(국가), 지적 자원, 문화 자본 등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글래드웰은 정부나 사회, 국제단체 등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도 다양한 기회를 많이 제공해야 한다며 책을 맺습니다. 글래드웰은 이 얘기를 하려고 1만 시간 법칙을 인용한 것이죠. 누구나 자기의 꿈을 위해 1만 시간을 훈련할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계발서로 시작해 사회복지학으로 끝나는 책입니다. 국내에서 인용되는 1만 시간 법칙은 의미가 반쪽만 전달된 사례입니다.

▽오독(誤讀·misreading)은 텍스트의 의미를 잘 못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것을 뜻하는데요, 시나 소설 등 문학작품에 대해 창작자-독자, 창작자-비평가, 독자-비평가들의 생각 차이를 말합니다. 문해력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인지, 의도나 감정 차이로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는데 현대 철학자들은 오히려 이 오독을 즐기라고 권유합니다. 그래야 저마다의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문학작품이 끝없이 창조된다는 것이죠. 좋은 영화일수록 해석이 분분하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술작품 얘기고요, 정보의 전달이 중요한 실용서 등에서 오독이 있어서는 안 되겠죠. 비문학작품을 쉬운 문장으로 쓰는 이유입니다. 오독을 막는 방법은 뭘까요. 책이라면 일단 끝까지 읽고, 수궁가도 끝까지 들어야겠네요.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속담이 와 닿습니다.

2020년 5월
2020년 5월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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