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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복제(Copy), 창작의 시작[고양이 눈썹]

입력 2022-06-11 14:13업데이트 2022-06-1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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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 작품


▽“Copy that(카피댓).”

군인들이 주인공인 헐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들리는 대사입니다. 무전 용어인데요, 알아들었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의도와 생각 등을 똑같이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2022년 3월
‘Copy’는 우리말로 하면 ‘베끼다’ 또는 ‘따라하다’입니다. ‘Copycat’은 ‘따라쟁이’ ‘흉내쟁이’로 번역되죠. 약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카피’야말로 인류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동물도 흉내를 낼 줄 압니다. 어미의 행동을 따라하며 사냥을 배우고 먹이를 찾습니다. 인간은 단순하게 따라할 뿐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냅니다. 모방을 ‘창조의 어머니’라고 봅니다. ‘카피’는 학습의 기본이니까요.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듯 완벽한 창작품은 없습니다. 모방·복제를 기초로 새로운 원본을 창출하는 힘.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이에 ‘시뮬라르크(Simulacr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학문은 원본을 찾는 노력입니다. 사회와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를 알아내려는 욕구죠. 사건의 이유, 그 사건을 일으킨 이전 사건, 또 그 이전 사건의 원인이 된 이전 사건…. 그런데 거꾸로 보면 현재의 사건은 이전 역사를 알 수 없다 해도 이미 실제로 존재합니다. 원본을 굳이 몰라도 현재를 인식하는 것에는 딱히 문제가 없죠. 보드리야르는 그래서 원본과 복사본(simulation)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결국 복제물들이 점차 원본을 대체하게 되는 세상이 현대 사회라고 규정합니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시뮬라르크 개념을 얘기했습니다. 대량 복제를 양산하는 시대에는 물품 뿐 아니라 정치 문화 분야에서까지 원본이 아닌 ‘허상’을 소비한다고 비판한 것이죠.

▽하지만 복제하는 능력이 인류의 큰 자산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선대의 두뇌를 후대가 ‘Copy’할 뿐 아니라 대량으로 널리 퍼뜨리는 능력. 아날로그 시대엔 완벽한 복제가 없었지만 디지털은 100% 복제됩니다. 심지어 무제한입니다. 텍스트도, 이미지도 파일처리만 되면 무한 복제되는 시대입니다.

▽베끼는 능력은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이전 것들을 다양하게 변주하면서요. 문화 콘텐츠의 경우, 앞선 작품들을 베낌과 동시에 비판하며 넘어섰고 패러디나 오마주로 변용하며 영역을 넓힙니다. 복제에 기반을 두고 청출어람으로 발전하려면 가급적 원본(Originality)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원본의 원본, 즉 역사를 몰라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모르면 실수를 되풀이 합니다. ‘역사는 처음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말은 역사를 학습하지 않았기에 생긴 말인 듯 합니다. 원본을 모르면 겉모습만 어설프게 따라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원인과 취지까지 이해하며 따라하다보면 임계점(Critical point)을 지나 새로운 영역을 여는 또 다른 원형(原形)을 창출할 수 있겠죠.

2018년 5월


2019년 7월. 동아일보DB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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