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예물까지’ 한강뷰 동만 노린 압구정 빈집털이[사건 Zoom In]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27일 12시 17분


코멘트

주민, 행인 시선 피해 한강 면한 아파트 동 노려
방음벽, 담장으로 막힌 외진 동이 표적
9일 동안 7차례 대낮 복도식 아파트 방범창 자르고 범행

이달 중순 7차례에 걸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아파트 단지를 돌며 수억 원 대 금품을 훔친 40대 절도범 김모 씨(구속)가 25일 검찰에 송치되고 있다. 뉴시스
이달 중순 7차례에 걸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아파트 단지를 돌며 수억 원 대 금품을 훔친 40대 절도범 김모 씨(구속)가 25일 검찰에 송치되고 있다. 뉴시스



“선물 받은 시계 쇼핑백이 바닥에 있는 거예요. 고양이가 건드렸나보다 했는데….”

12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남편과 사흘간 지방에 다녀온 신혼의 A 씨는 현관문에서 멈칫했습니다. 외출할 때 분명히 꺼뒀던 실내조명이 켜져 있었고, 집은 아수라장이 돼 있었지요. 고양이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안방에 들어선 순간 A 씨는 그 자리에서 몸이 얼어붙었습니다. 옷장 문은 열려 있었고 보관 중이던 현금 봉투와 결혼 예물, 명품 가방까지 모두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도둑맞은 금품은 시가로 3500만 원 어치. A 씨는 “도둑이 보석함을 열어 깡그리 털어갔다”고 했습니다.

이달 10~18일 압구정동 일대의 아파트 단지를 돌며 7차례에 걸쳐 빈집을 턴 40대 절도범 김모 씨가 19일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국내 대표 부촌(富村)에서 잇따라 빈집털이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김 씨가 턴 금품은 2억2000만 원 상당에 이릅니다.

A 씨는 “왜 우리 집을 노렸는지 모르겠다”라며 “범인이 우리가 신혼부부라는 걸 알았거나, 아니면 이틀 전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가는 걸 본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고 했습니다.
● 대낮에 빈집 7곳 턴 간 큰 절도범
범행 현장인 아파트는 국내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축에 속하는 단지입니다. 보안 시설도 잘 갖춰져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대낮에 9일 동안 7번이나 털린 것일까요?

기자가 도둑을 맞은 아파트 단지를 찾아 현장을 살펴본 결과 범행 장소에서 일정한 패턴이 발견됐습니다. 먼저 도둑을 맞은 7곳 모두 복도식 아파트였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복도식 아파트는 계단식 아파트에 비해 방범에 취약점이 있습니다. 복도 쪽 창문을 통해 도둑이 침입하기가 쉬운 탓입니다. 빈집털이범들은 웬만한 방범창은 도구를 사용해 어렵지 않게 뜯어내거나 잘라냅니다.

A 씨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1980년대 초 지어진 A 씨의 아파트는 ‘복도식’과 ‘계단식’이 섞여 있는데, A 씨가 사는 동은 복도식입니다. 범인은 복도 쪽 창문의 방범창을 절단한 뒤 침입했습니다.

범인은 모두 5개 동으로 이뤄진 한 아파트단지에서 3개 동을 털었습니다. 한데 범행을 피한 2개 동이 모두 계단식입니다. 계단식 동은 오히려 평수가 크지만 털리지 않았습니다. 아 아파트 단지 관계자는 “주민들 사이에 오히려 집값이 더 비싼 집들이 절도를 피했다는 말이 돈다”고 전했습니다.

최근 빈집털이를 당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방범창 일부가 훼손돼있다. 범인은 초인종을 눌러 빈 집인 것을 확인한 후 방범창을 뜯고 침입하는 수법으로 이달 10~18일 7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다.
최근 빈집털이를 당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방범창 일부가 훼손돼있다. 범인은 초인종을 눌러 빈 집인 것을 확인한 후 방범창을 뜯고 침입하는 수법으로 이달 10~18일 7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다.

●후미진 복도식 아파트만 골라 털었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또 있습니다. 바로 ‘한강’입니다.

A 씨의 집은 아파트 단지에서도 북쪽에 위치해 한강에 바로 면해 있는 ‘끝동’입니다. 복도식 아파트라도 대부분의 아파트 동은 단지를 오가는 사람이나 다른 동 주민의 시선에 노출돼 있습니다. 그러나 A 씨의 집은 복도 건너편에 다른 아파트 동이 없고 한강뿐이어서 범인이 주민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한강의 호젓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오히려 방범에는 취약한 단점이 돼 버린 셈입니다.

A 씨에 따르면 A 씨가 경찰에 신고한 날 근처 또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도 두 집이 절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확인해보니 이 두 집 역시 마찬가지로 모두 아파트 단지에서도 북쪽에 위치해 한강에 바로 면해 있는 끝동이었습니다.

꼭 끝동이 아니더라도, 범행은 단지 내에서 유독 외진 곳에 위치한 동에서 발생했습니다. 기자가 범행 3건이 발생한 한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니 피해를 당한 집들 주변은 대낮에도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1곳은 한강에 접한 끝동이고, 나머지 2곳은 방음벽이나 담장 등으로 한쪽이 막혀 있었습니다. 빈집털이를 당한 또 다른 아파트 단지도 환경이 이와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압구정동 일대 아파트 130여 동 중 복도식 아파트는 3분의 1 가량인데, 범인은 복도식 아파트 중에서도 발각 우려가 적은 아파트만 노린 것입니다.

아파트 동 내에서도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와 가까이 붙어 있는 집이 표적이 됐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범인은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려서 집이 비었음을 확인한 뒤 방범창을 떼어내거나 절단해 집 안으로 침입했습니다. 범행이 벌어진 아파트 단지 관계자는 “혹시라도 누군가를 마주치면 신속하게 숨거나 도망갈 수 있도록 비상계단과 가까운 집을 노린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장물 팔려다 경찰에 덜미
범행이 7차례나 계속되는 동안 수법은 갈수록 대범해졌습니다.

15일 오후 8시경 범인은 범행 도중 집주인이 귀가하자 “돈만 주면 가겠다”며 흉기로 집주인을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집주인의 지갑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집주인 B 씨는 “사건 이후 외부인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며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날 오후 10시 30분경 같은 단지에서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가 추가로 접수됐습니다. 주인은 11시간 정도 집을 비웠다고 합니다. 이 사건도 김 씨의 범행이었습니다.

경찰은 어렵게 범인 신원을 특정했지만 범인이 추적을 피하려고 각종 수를 쓰는 바람에 소재 파악에 애를 먹었습니다.

범인은 결국 훔친 명품 등 장물을 팔려다가 덜미가 잡혔습니다. 한 중고 물품 매입업체와 통화하면서 위치가 드러난 겁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19일 범인이 있는 곳으로 형사들을 급파했고, 강남의 한 지하철역 인근 횡단보도 앞에서 긴급 체포했습니다. 절도 전과가 적지 않은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부자들이 많은 강남에서 빈집을 털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김 씨는 특수강도 및 절도 혐의로 21일 구속됐습니다. 김 씨가 훔친 피해 금품들은 일부 압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압구정동 연쇄절도 사건은 대낮에 발생한 범죄인데도 범인의 모습이 정확히 찍힌 폐쇄회로(CC)TV를 확보하기 힘들어 경찰의 수사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파트 측은 이번 연쇄 절도 사건을 계기로 방범 설비 추가 설치를 논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복도식 아파트, 특히 주민과 행인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동에 사는 분들은 각별히 빈집털이를 주의하셔야겠습니다.


김윤이 기자 yunik@donga.com
최승연 채널A기자 su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