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프지 말고 편히 쉬렴”…‘반도체 백혈병’ 황유미씨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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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3월 4일 07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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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12주기 앞두고 2일 강원 고성서 추모 행사
삼성과 합의 이후 제보 늘어…과제 여전히 남아

“지금까지 싸우느라 하늘나라 못 갔을 것 같은데 이제 하늘나라 가서 좀 아프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

어머니는 이날도 울었다. 어머니는 딸과 행복하게 지냈던 옛 기억보다 딸이 죽기 전 아팠던 모습만 자꾸 떠오른다고 했다. 아직도 약을 너무 많이 먹어야 해서 정신이 없다던 어머니는 딸을 추모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2일 오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은 오는 6일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고(故) 황유미씨의 12주기에 앞서 고인의 고향인 강원 속초시에서 떨어진 고성군에서 추모 행사를 열었다.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산1-4. 추모식이 열린 장소는 유미씨의 유골이 뿌려진 자리다. 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64)는 직접 이곳에 딸의 유골을 자연으로 돌려보냈다. 반도체공장에서 화학약품 냄새만 맡다가 숨진 딸이 안타까워 설악산 내 한 언덕배기, 공기가 맑은 이곳을 딸의 마지막 쉼터로 정했다. 오른편으로는 동해가, 왼편으로는 울산바위가 보였다.

유골을 이곳에 뿌릴 당시 현장에는 유미씨의 지인과 가족들, 그리고 삼성 직원들이 있었다. 상기씨는 “그때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막 났어요”라며 손에 들고 있던 딸의 유골을 삼성 직원들에게 던져버리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상기씨는 “그때는 우리 편을 들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라고 말했다.

상기씨는 과거에는 아무도 자신의 편이 돼준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이날 추모식에는 50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반올림 관계자를 비롯해 삼성그룹 계열사의 해고자, 산재 피해자와 가족, 일본 노동조합 관계자, 해고자와 산재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감과 연대의 의미를 담은 연극 ‘은하계 제국에서 랑데부’를 준비 중인 한국예술종합대학 학생들까지 모여 추모의 뜻을 전했다.

특히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밸트 산재 피해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51)도 추모식을 찾아 유미씨의 부모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김미숙씨는 “같은 아픔을 겪고 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며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잘 살 수 있도록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고 말했다. 이어 황상기씨에게 “앞서서 싸워주신 본보기가 있어서 나설 수 있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오는 4월 무대에 오르는 은하계 제국에서 랑데부를 준비하고 있는 배우 홍선우씨(32)는 “그동안 연극을 준비하며 반올림 활동가, 피해가족들 인터뷰를 간접적으로 듣기만 했는데 이번에 직접 (그 감정을) 느끼게 돼서 많이 울었다”라며 “요즘 사회에 연대와 협력한다는 의식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많은 분이 오신 것을 보고 희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2003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한 유미씨는 반도체 세정작업을 했다. 그리고 만 20세인 2005년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2년 뒤인 2007년 수원 아주대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속초 집으로 돌아오던 유미씨는 택시기사였던 아버지의 택시 뒷좌석에서 사망했다. 유미씨의 죽음으로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가 터져 나왔고 반올림이 결성됐다.

처음 삼성전자는 반도체 제작 공정이 백혈병 등 직업병 발생과 연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지속적인 요구와 여론의 압박에 삼성은 2014년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해 10월부터 삼성과 피해가족들은 조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정위가 발표하는 중재안을 따르기로 했다.

2015년 7월 조정위가 1000억원의 피해보상기금 조성과 재발 방지를 위한 사단법인 설립을 골자로 한 중재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삼성과 일부 피해자 가족들이 재단 설립을 반대하고 개별 보상협상에 나서고 반올림 측은 이를 거부하면서 갈등이 계속됐다.

갈등은 사건 발생 11년 후인 지난해 봉합되는 모습을 보였다. 중재위가 2차 조정의 뜻을 밝혔고 양측의 어떤 중재안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어 지난해 11월 삼성은 2차 중재 결과를 받아들여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보상과 지원 절차를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재 문제가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다. 현재도 관련된 제보가 이어지고 있으며 지난해 합의 이후에는 피해 제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반올림에 따르면 삼성그룹 계열사 전체에 대한 산재 관련 제보는 합의 이전까지 지난 11년간 320명(사망 118명)이었지만, 합의 이후 4개월여 동안 537명(사망 171명)으로 늘었다. 그동안 산재 인정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피해자들의 제보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반올림은 4일 오전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새롭게 제출된 제보 내용 중 15명에 대한 집단산재 신청을 할 예정이다. 반올림 관계자는 “판례를 통해 첨단 전자산업에서 발생한 직업병이 어떻게 판단돼야 한다는 기준이 마련된 만큼 앞으로도 그 기준이 확립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며 “근본적으로 노동환경을 개선해 노동자들이 병에 걸려 다치거나 죽는 일을 줄여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유미씨의 12주기인 6일에는 서울 종로구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오후 7시부터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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