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한다” 말에 속아 갖은 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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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11월 29일 0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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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판결 앞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사연은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2013년 10월4일 광주지법 제12민사부(부장판사 이종광) 심리로 진행되는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증언하기 위해 법정에 앉아 있다. 양금덕 할머니가 증언할 순서를 기다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2013년 10월4일 광주지법 제12민사부(부장판사 이종광) 심리로 진행되는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증언하기 위해 법정에 앉아 있다. 양금덕 할머니가 증언할 순서를 기다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 ‘소녀’들이 여든을 넘긴 ‘할머니’가 돼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29일 나올 예정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로 불리는 이들의 기구하고 가슴 아픈 사연이 이번 재판을 계기로 다시 한번 관심을 모으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89)는 유학의 길인줄 알고 떠났다가 ‘지옥’을 경험했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5월 30일. 전남 나주초등학교 6학년 한 교실에 일본인 담임 교사와 교장, 헌병이 갑자기 들어왔다.

이들은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며 초등학생들에게 ‘유학’을 권유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담임 교사는 반장 양금덕양을 지목했다.

양 할머니는 뛸듯이 기뻤다. 일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단지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설렜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양 할머니는 친구들과 선배 등 24명과 나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수로, 여수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했다.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에 짐을 풀자마자 일이 시작됐다. 노동의 강도는 한국에서 예상했던 수준이 아니었다. 독한 시너와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아야 했다. 또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화장실을 가려면 ‘반장’이라고 불리던 일본인에게 맞아야 했다. 식사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남이 먹다 버린 밥을 주워 먹기가 일쑤였다. 고된 노동으로 후각이 마비되는 등 몸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일본에서의 지옥같은 생활이 끝난 것은 해방 이후다. 양 할머니는 1945년 10월이 돼서야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에서 매일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한 고국이었지만 더욱 고된 삶이 이어졌다. 일본에서 일하고 왔다는 이유로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 취급을 받은 것이다.

남자들은 “오늘 하룻밤 같이 놀자”며 놀려댔다. 맞선을 봤지만 일본에서 일했던 사실이 알려지면 남자들과의 연락은 끊겼다.

일본에서의 끔찍한 생활을 버티고 견뎌냈지만 광복 후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저기 ‘위안부 할머니’가 지나간다”는 수근거림이 들린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착각한 사람들의 말이다.

김성주 할머니(89)는 1944년 전남 순천 남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일본에 가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일본에 갔다.

일본인들의 거짓말에 속아 아버지의 도장을 훔치면서까지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에 왔지만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어린 나이에 절단기를 이용해 금속판을 절단하는 일이 주어졌다.

안전장치는 커녕 장갑조차도 지급받지 못한 상황에서 일을 했다. 결국 사고가 터졌다. 절단기에 왼쪽 손가락 하나가 잘린 것이다.

1944년 12월에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무릎뼈가 튀어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제대로된 치료는 기대할 수 없었다.

어느날 “한국에 있는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조건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갈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 할머니는 자신의 여동생도 “일본에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 일본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려운 생활이 이어졌다. 결혼은 했지만 일본에 다녀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또다른 원고인 박해옥 할머니(88)도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학교장의 권유로 동원됐고, 이동련 할머니(89)도 나주초등학교를 졸업 후인 1944년 일본인 담임선생의 권유로 일본으로 가게 됐다.

앞의 두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갖은 고생을 겪고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한국에서도 각종 오해 속에 정신적인 고초를 겪었다.

4명의 할머니들은 2009년 일본 후생연금 99엔 사건의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김중곤 할아버지(94)는 유족으로 이번 소송에 참여했다. 1944년 여동생 고 김순례씨와 부인 고 김복례씨가 미쓰비시중공업에 동원됐다. 김 할아버지의 여동생은 도난카이 지진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원고 5명은 모두 고령인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 입원을 하는 등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관계자는 “할머니와 유족이 재판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혔었지만 건강상 문제로 김성주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며 “대법원이 좋은 결과를 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광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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