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결혼하겠다”며 착실히 돈 모으던 아들…고시원 화재가 앗아간 희생자의 삶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1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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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맣게 타버린 고시원 3층 복도. 천장이 무너져 내렸고 목재로 된 문틀이 숯덩이로 변했다. 5∼10㎡(1.5~3평) 크기가 방 29개가 폭 1m의 좁은 복도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있어 불길이 빠르게 번졌다. 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새까맣게 타버린 고시원 3층 복도. 천장이 무너져 내렸고 목재로 된 문틀이 숯덩이로 변했다. 5∼10㎡(1.5~3평) 크기가 방 29개가 폭 1m의 좁은 복도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있어 불길이 빠르게 번졌다. 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9일 발생한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희생자들은 6.6㎡(2평) 안팎의 좁은 방에서 지내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단란한 가정을 이루겠다며 착실히 돈을 모으던 30대 남성도, 자녀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50대 가장도 새벽에 덮친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 결혼 자금 모으려고 안간힘 쓰던 34세 우체국 직원


“아이고…아, 아….”

11일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 조모 씨(34)의 어머니 A 씨의 통곡이 울려 퍼졌다. 사흘 내내 눈물을 쏟아낸 어머니는 목소리마저 갈라졌다. A 씨는 아들의 시신이 담긴 관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슬픈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있겠나. 이렇게 허망하게 가버려서 어떻게 하냐”고 오열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흰 수염이 길게 자란 아버지 조덕휘 씨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뒷짐을 졌다. 조 씨는 아들의 마지막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삼형제 중 장남인 조 씨는 전북 전주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2009년 우정사업본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주로 배달물건을 분류하는 작업 등을 했다고 한다. 2015년경에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조 씨는 성실하게 일했고 돈을 무척 아꼈다고 가족과 지인들은 전했다. 식사는 구내식당에서만 했다. 보통 직원들이 2500원 짜리 식권을 10장 단위로 사는 데 반해 조 씨는 2, 3장씩만 구입했다. 큰 돈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데다 혹시라도 식권이 남을까 걱정했던 것. 옷은 늘 작업용 유니폼을 입었고, 머리도 가장 싼 스포츠 스타일을 고집했다. 직장동료 B 씨는 “돈을 아껴야 하니까 선배들이 사주는 경우가 아니면 늘 구내식당에서만 먹었다”며 “일주일 전에 이 친구가 ‘형 식권 2장만 줘’라고 하길래 ‘야, 돈 가지고 와’라고 농담조로 말한 게 너무 마음에 걸린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조 씨가 유일하게 자신에게 허락한 소비는 야구와 조조영화 관람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절반가량을 모아 적금을 들었고, 반려자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꿈을 꿨다. 이를 위해 고시원에서의 삶을 택했다. 직장동료들이 오피스텔을 얻어서 편하게 쉬라고 권유했지만 ‘부담이 된다’며 거절했다. 조 씨는 저렴한 거주지를 찾아 올해에만 2차례 이사했다고 한다. 아버지 조덕휘 씨는 “좁은 방에서 생활하려다 보니까 불편해했다. 돈이 많으면 아파트를 한 채 사주든지, 전세를 한다든지 (할 텐데)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부모를 잘못 만난 탓으로 고생하다가 이렇게 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족들의 기억 속에 조 씨는 책임감이 강하고 과묵한 사람이었다. 조 씨의 고모부 C 씨는 “말수는 적었지만 얘기하면 잘 웃었다”며 “동생이 두 명 있어서인지 책임감이 아주 강했다”고 기억했다. 조 씨의 작은아버지(55) 역시 “정말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2평에 30만 원짜리 고시원이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조 씨는 인사성이 밝아 직장 동료와 상사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직장상사 최모 씨(48)는 “지나가다가 만나면 반갑다고 환하게 웃으며 껌 하나씩을 손에 쥐어주던 게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빈소가 차려진 사흘 동안 100명이 넘는 친지와 직장동료들이 찾아와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운구는 동료 8명이 했다. 조 씨의 시신은 서울 서초구의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친 뒤 고향으로 내려갔다.

● “아빠처럼 되고 싶다”는 말 듣고 싶었는데….

희생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은 대체로 조용했다. 이모 씨(62)는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다. 젊은 시절 경기 과천시의 목장에서 젖소를 기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누나 D 씨(65)는 “동생이 원래 가족과 함께 살다가 집 나간 지 몇 년 됐다. 한참 동안 연락이 없어서 어떻게 지냈는지 몰랐다”고 했다. 장모 씨(72)는 서울 종로구 인근에서 오락실 사업으로 한 때 큰 돈을 벌기도 했지만 사업에 실패한 뒤 24시간 사우나에서 청소를 하며 기초생활수급자로 지냈다.

사망자 중 일본인 E 씨(53)는 아내, 자녀와 떨어져 살며 S일본어학원에서 회화 강사로 일했다. 틈틈이 일본어 일대일 개인과외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아빠같이 되고 싶다! 아이들한테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나의 남은 인생의 목표’라고 적혀 있었다.

서울대병원에 안치됐던 조모 씨(78)는 유족의 뜻에 따라 조용히 고향으로 이동해 빈소를 차렸다. 가족과 2년 간 연락이 끊겼던 양모 씨(57)의 경우 유족을 찾는데 하루가 넘게 걸리기도 했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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