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 탄 불덩이, 주택 33채 삼켜… “몸만 빠져나와 막막”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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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산불 덮친 강릉-삼척-상주
집 잃은 강릉 주민 “가족사진도 못챙겨”… 시청 인근까지 불 번져 연기 자욱
7일밤 잔불 되살아나 또 대피
100ha 산림 피해 삼척도 큰불 못잡아… 상주선 불길 피하던 등산객 실족사
강릉-삼척 산불 입산자 실화 추정

① 7일 강원 삼척시 도계읍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을 끄기 위해 소방헬기가 물을 뿌리고 있다. ② 이날 강릉시 성산면 야산에서 시청 
산불진화대 직원들이 잔불 정리를 하고 있다. ③ 전날 산불로 발생한 매캐한 연기가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동해고속도로 상공이 
먹구름이 낀 듯 잔뜩 흐려 있다. 삼척시 제공 / 강릉=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강릉=뉴시스
7일 강원 삼척시 도계읍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을 끄기 위해 소방헬기가 물을 뿌리고 있다. 이날 강릉시 성산면 야산에서 시청 산불진화대 직원들이 잔불 정리를 하고 있다. 전날 산불로 발생한 매캐한 연기가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동해고속도로 상공이 먹구름이 낀 듯 잔뜩 흐려 있다. 삼척시 제공 / 강릉=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강릉=뉴시스
“불이야 불, 일단 나와요 빨리!”

6일 오후 6시경 여느 토요일처럼 느긋하게 TV를 보며 쉬던 강원 강릉시 성산면 관음2리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외침에 깜짝 놀랐다. 밖으로 나온 주민들은 눈앞에서 불붙은 나뭇잎이 날아다니는 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피했지만 지갑이나 귀중품도 챙기지 못한 채 몸만 빠져나온 사람이 수두룩했다. 이순희 씨(71·여)는 “큰 소리에 나왔더니 바람을 따라 여기저기로 옮겨붙는 불덩이가 보였다”며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고 말했다.

강릉 산불은 6일 오후 3시 27분경 성산면 어흘리 야산에서 시작됐다. 밤새 진화작업을 벌인 끝에 7일 오후 6시경 대부분의 불이 꺼졌다. 하지만 이날 오후 9시 25분경 최초 발화 지점에서 잔불이 살아나 근처 주민들에게 다시 대피령이 내려졌다. 이번 불로 7일 오후 11시 현재 강릉시 성산면과 홍제동 주택 33채(폐가 3채)와 산림 50ha가 불에 탔다. 하루 만에 이재민이 된 주민들은 무너져 내린 터를 황망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 강릉 도심까지 덮친 화마의 공포

대형 산불이 많은 강원 지역이지만 이번 불길은 강풍이 화염을 시내까지 옮겨 주민들의 불안감을 더욱 키웠다. 6일 일몰 후에도 바람이 잠잠해지지 않으면서 불은 강릉시 중심가인 영동고속도로 강릉 나들목 인근 영동대 후문과 우미린아파트, 강릉시청 100m 인접까지 접근했다. 내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위해 공사 중인 선수촌 아파트 공사장 근처까지 불이 번졌다. 이번 산불로 소실된 주택 가운데 12채가 도심 인근에 위치했다.

강릉 시내 주민들은 유례없는 화재에 이틀 내내 공포에 떨었다. 우미린아파트 주민 우모 씨(54·여)는 “퇴근 당시 연기가 시야를 가리고 매캐한 냄새까지 풍겨 너무 무서웠다”며 “자녀들과 함께 도심 모텔로 대피했다가 밤에 바람이 잦아들어 귀가했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온라인에선 ‘강릉 시내까지 불이 번졌다’는 가짜 뉴스까지 돌았다.

6일 밤늦게까지 불길이 잡히지 않자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고 320여 명의 주민과 요양원 노인들이 긴급 대피소인 성산초등학교와 노인종합복지회관, 강릉초등학교 등으로 각각 대피했다. 강릉영동대 기숙사와 요양원에 머물던 사람들도 밤늦게 급히 긴급 대피소로 이동했다.

도심가에 인접한 강릉교도소에도 한때 긴장감이 흘렀다. 수용자들이 수감돼 있는 수용동과 20m 떨어진 소나무에 불이 붙어 한때 재소자 330여 명의 이감이 검토되기도 했다. 강원 춘천시, 영월군으로의 이감을 고려했지만 큰 불길이 잡히면서 취소됐다.

○ “가족사진 한 장도 건지지 못해”

하룻밤 사이에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망연자실했다. 전학표 씨(57)는 폐허가 된 집터를 바라보며 “30여 년 전 집 앞마당에서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지금까지 살았는데 이젠 가족사진 한 장 남은 게 없다”고 낙담했다.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전 씨의 부인은 “이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뿐”이라며 억지로 눈물을 참아냈다.

송두헌 씨(84)도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알록달록한 꽃과 화분으로 화사했던 마당은 불에 그을려 시들어버린 꽃잎과 부서진 화분들만 나뒹굴고 있었다. 송 씨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타 버린 집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강릉시 홍제동의 한 시민은 흔적만 남은 집터에서 불에 그을린 족보를 정리하며 안타까워했다. 유동희 씨(78)와 이복동 씨(71·여) 부부도 6년생 애완견 ‘아롱이’밖에 데려오지 못했다.

강릉지역 한 온라인 맘카페에는 “관음리 화재로 집이 다 타버렸다. 생후 24일된 아들만 겨우 데리고 나왔다”며 챙겨 오지 못한 아이용품 지원을 요청하는 안타까운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옷을 버리지 않으려고 구호물품에서 생리대를 꺼내 수유패드 대신 가슴에 대고 아기와 잠들려는데 자꾸 막막한 생각이 드네요”라고 열악한 상황을 설명하며 “혹시 안 입는 아이 옷이나 용품이 있다면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온라인에서는 이들을 돕겠다는 글이 이어지고 있다.

삼척 산불은 진화마저 쉽지 않은 상황이다. 6일 오전 11시 42분경 삼척시 도계읍 점리에서 발생한 산불은 7일에도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까지 폐가 2채가 소실됐고 100ha 이상의 산림이 피해를 입었으며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강릉과 삼척 산불 모두 입산자 실화가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날 경북 상주시 사벌면 덕가리 가막골 뒷산에서 발생한 산불은 7일 오전 10시 반경 진화됐다. 이 불로 등산객 김모 씨(60·여)가 불길을 피하다 실족해 숨졌고 일행인 장모 씨(65) 등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강풍과 건조한 날씨 탓에 한때 불길이 커지면서 사벌면 일대 123가구 215명이 6일 오후 6시 반경 대피했다가 다음 날 오전 귀가했다. 또 7일 오후 7시 10분경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포대가 배치된 경북 성주군 성주골프장 바로 옆 달마산(해발 680m)에서 불이 났으나 약 1시간 뒤 큰 불길이 잡혔다.

강릉=김예윤 yeah@donga.com·정지영 / 상주=장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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