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부부를 다시 이어준 ‘그림 다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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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경위기 부부에게 미술 심리치료하는 법원

지난해 12월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미술심리치료 사례 특별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전시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서울서부지법 제공
지난해 12월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미술심리치료 사례 특별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전시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서울서부지법 제공
 지난해 12월 서울 마포구 마포대로 서울서부지법에서 미술전시회가 열렸다. 법원 청사 3, 4층에 그림 53점이 나란히 걸렸다. 이 중에는 배은오(가명·45·여) 씨의 그림도 있었다. 배 씨는 지난해 이혼을 결심하고 법원을 찾았다가 미술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배 씨는 한 점 한 점 그림을 그리며 남편을 향한 분노와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감 없이 토해냈다.

 이날 전시회의 이름은 ‘선물’. 배 씨처럼 이혼 위기에 놓인 당사자와 부모를 둔 자녀들이 미술심리치료를 받으며 그린 그림들을 선보였다. 서울서부지법은 전국 법원 중 유일하게 2014년부터 3년간 이혼 가정을 위한 미술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프로그램의 상담위원으로 활동 중인 신은숙 변호사(33·여)는 “경험하지 못한 위기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다시 희망으로 바꾸고 새로운 삶이 열릴 수 있게 돕는 게 프로그램의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어린 딸까지 고통에 빠뜨린 이혼 스트레스

지난해 6월 서울서부지법 주최로 인천 강화군 에버리치호텔에서 열린 ‘가족 공감 힐링캠프’에서 참가자 가족들이 미술 작품을 만들고 있다. 서부지법은 이혼을 앞둔 부부와 미성년 자녀를 대상으로 미술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해 위기 가정이 겪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서울서부지법 제공
지난해 6월 서울서부지법 주최로 인천 강화군 에버리치호텔에서 열린 ‘가족 공감 힐링캠프’에서 참가자 가족들이 미술 작품을 만들고 있다. 서부지법은 이혼을 앞둔 부부와 미성년 자녀를 대상으로 미술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해 위기 가정이 겪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서울서부지법 제공
 2015년 임형수(가명·34) 씨와 최민영(가명·32·여) 씨 부부는 서울서부지법을 찾았다. 이혼 신청을 위해서다. 결혼 전 사소한 다툼이 결혼 후 잦아진 탓이다. 무엇보다 육아 스트레스가 두 사람의 마음을 멀어지게 했다.

 임 씨 부부가 찾은 서부지법에는 이혼법정 옆에 심리치료실이 있다. 2014년부터 서부지법이 운영 중인 이혼 가정 자녀를 위한 미술심리치료가 이뤄지는 곳이다. 임 씨 부부는 이혼에 앞서 주어지는 숙려 기간에 미술심리치료를 받아보기로 결정했다. 당시 다섯 살이던 딸 지유(가명·7) 양 때문이었다.

 임 씨 부부의 다툼이 심해질수록 지유가 받는 스트레스도 심해졌다. 지유는 이유 없이 팔이나 머리를 심하게 긁는 자해행위를 반복했다. 다른 사람을 물기도 했다. 임 씨 부부는 자신들의 감정과 별개로 더 이상 지유를 방치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부부의 결정도 쉽지 않았지만 시작은 더욱 어려웠다. 미술심리치료를 위해 상담실을 처음 찾았을 때 최 씨는 남편과 함께 치료받는 걸 거부했다. 엄마로서 단지 지유의 상태만 호전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부부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이었다. 최 씨가 남편과의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자 김현민 상담위원(44·여)은 “처음부터 아이 아빠와 함께 치료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최 씨를 설득했다. “치료가 진행되면서 관계가 호전될 경우에만 함께 참여하는 치료 프로그램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채 법원을 찾은 만큼 임 씨 부부는 처음부터 크고 작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치료가 계속되던 2015년 여름 최 씨는 지유를 두고 가출까지 했다. 최 씨는 “육아와 가정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를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기자에게 털어놨다.

 임 씨 부부는 상담위원 몰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도 했다. 6개월에 가까운 상담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파경을 맞은 것이다. 문제는 조금씩 좋아지던 지유의 상태가 다시 악화된 것이다. 이를 본 최 씨는 상담위원에게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 홧김에 이혼을 했는데 지유를 보니 후회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임 씨 부부는 다시 심리치료를 이어갔다.

 임 씨 부부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건 대부분 사소한 이유였다. 김 위원은 “이 부분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 중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안 좋았던 기억들이 수시로 튀어 나온다”며 “서로의 평소 말투를 고치기 위해 배려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했고 결과적으로 습관이 달라지면서 상대방의 작은 것에도 감동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소한 부분을 고쳐나가자 치료의 효과는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지유 역시 상담 초기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치료가 진행되면서 물감과 점토 인형 등으로 자신의 스트레스와 분노 등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이후 점차 안정된 모습을 보이자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가족상담을 진행했다. 김 위원은 “배우자 표현하기, 부부 이어 그리기, 가족 협동작품 만들기 등 미술활동을 통해 지유와 임 씨 부부는 서로를 좀 더 이해하게 되고 정서적 교류와 신뢰감을 되찾게 됐다”고 말했다.

 임 씨 부부와 지유는 2015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에 가까운 기간 상담을 받았다. 상담이 끝난 후 임 씨 가족은 재결합을 결정했다. 상담 기간 홧김에 한 이혼을 뒤로하고 다시 혼인 신고도 마쳤다.

 이 무렵 최 씨는 지유 같은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 미술심리치료 공부를 시작했고 지난해 7월 심리치료사 자격증을 땄다. 최 씨는 지금 지유와 비슷한 아이들을 돕고 있다.

벼랑 끝에서 다시 희망을 품은 50대 가장

 고교 3학년인 막내아들까지 3형제를 키운 박순길(가명·55) 씨도 2015년 이혼을 하기 위해 서울서부지법을 찾았다. 사업 실패 후 닥친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박 씨 부부는 그해 가을 법원을 찾았다. 손에는 이혼 서류가 들려 있었다. 3주간의 숙려 기간에 법원은 미술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추천했다. 박 씨는 응했지만 아내는 완강히 거절했다.

 이효진 상담위원(39·여)은 “박 씨가 처음 상담실을 찾았을 때 수험생인 막내아들 걱정이 많았다”고 말했다. 박 씨의 막내아들 장빈(가명·20) 씨는 당시 입시 준비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심리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박 씨는 결국 아내와 자녀들 없이 홀로 상담위원을 찾았다.

 상담 초기 박 씨는 20년이 넘게 결혼생활을 이어오다 50대에 접어들어 이혼의 위기를 맞게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박 씨를 처음 본 이 위원도 “자신의 주장을 가족들에게 강요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아내는 물론이고 자녀들도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이 위원은 상담 첫 주 박 씨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라고 권했다. 박 씨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이 위원은 박 씨에게 “가족들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소통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이었지만 박 씨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위기가 찾아왔다. 숙려 기간이 모두 끝난 3개월 뒤 박 씨는 아내와 결국 이혼했다. 박 씨는 당시를 돌이켜 보며 “20년 넘게 함께 산 아내의 행동에 자괴감도 많이 들었고 극단적인 생각도 몇 번이나 했다”고 털어놨다. 실제 자살 징후 상담 결과 박 씨는 자살우려군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박 씨는 “자신이 해온 노력을 가족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당시 감정을 표현했다.

 이혼의 아픔에도 박 씨는 미술심리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막내아들을 포함한 세 아들을 생각하면서 아내와의 관계가 나아지기를 바랐다. 박 씨와 세 아들의 관계는 다른 부자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뚝뚝한 네 남자 사이는 전화 통화도 몇 차례 하지 않을 정도로 서먹했다.

 치료가 진행되면서 박 씨가 조금씩 다가서는 모습을 보이자 굳게 닫힌 자녀들의 마음 문이 조금씩 열렸다. 박 씨는 “이혼 후 엄마와 함께 살게 된 막내아들이 걸어온 전화도 종종 받는다”고 말했다. 아들이 엄마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 때면 당장이라도 아빠에게 와서 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박 씨는 “네가 그런 얘기를 아빠에게 하면 엄마가 불편해할지 모른다”며 오히려 아들을 타일렀다.

‘가족 공감 힐링캠프’ 행사 참가자들이 만든 연등과 물고기 그림. 그림 속 물고기들이 서로 입을 맞추거나 마주한 모습은 가족 관계가 친밀하게 바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서울서부지법 제공
‘가족 공감 힐링캠프’ 행사 참가자들이 만든 연등과 물고기 그림. 그림 속 물고기들이 서로 입을 맞추거나 마주한 모습은 가족 관계가 친밀하게 바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서울서부지법 제공
 미술심리치료가 끝나갈 무렵 박 씨가 그린 그림은 먼 산을 바라보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 위원은 “심리치료에서 산은 보통 걱정과 근심을 나타낸다. 박 씨의 근심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의미”라며 “그래도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는 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돌볼 여유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인생 그래프도 다시 그렸다. 프로그램 초기 박 씨가 그린 그래프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혼 후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 씨가 다시 그린 그래프는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정동연 기자 call@donga.com
#미술 심리치료#파경 위기 부부#가족 공감 힐링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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