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눈물의 추도순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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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서 5600km 낯선 마셜제도… 아버지의 恨 떠올리며 흐느껴

콰절린에서 아버지를 잃은 정진복, 박영옥, 박복균 씨(왼쪽부터)가 바다를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다. 마주로=박창규 기자 kyu@donga.com
콰절린에서 아버지를 잃은 정진복, 박영옥, 박복균 씨(왼쪽부터)가 바다를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다. 마주로=박창규 기자 kyu@donga.com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져오긴 했는데….”

박영옥 씨(74·여)가 손가방에서 주섬주섬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나왔다. 박 씨 아버지였다. 사진 속 아버지는 늠름한 자세로 군용 트럭 옆에 서 있었다. 닳을까 걱정됐는지 사진 끝을 잡은 박 씨의 손길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태평양의 작은 섬 콰절린. 1944년 2월 6일 박 씨 아버지가 숨을 거둔 곳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일본과 미국이 격전을 벌이던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1914년부터 일본은 사이판에서 마셜 제도에 이르는 광활한 해역에 흩어진 섬 620여 개를 점령한 뒤 남양 군도라고 불렀다. 일본은 이 지역 섬을 징검다리 삼아 미국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남양 군도에 배치된 일본군 병력은 총 3만2000여 명. 이 중에는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강제징용 조선인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둘 총알받이로 스러져 갔다.

13일 이른 오전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는 일제가 벌인 전쟁에 끌려간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형을 잃어야만 했던 유족들이 하나둘 모였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마련한 희생자 유족의 국외 추도순례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목적지는 마셜 제도의 수도 마주로. 한국과는 직선거리로 5600km가량 떨어진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다. 괌까지 비행기로 5시간, 그 이튿날 다시 9시간을 더 가야 마주로에 닿을 수 있다. 괌에서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추크, 폰페이, 코스라에를 차례로 거친 뒤 콰절린을 찍고 마주로로 가는 완행버스 같은 비행기를 타야 한다.

콰절린은 참가 유족 15명 중 6명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곳. 그러나 이곳엔 미군기지가 있어 허가를 받은 사람만 타고 내릴 수 있다. 박복균 씨(76·여)는 “이 주변 어딘가에서 우리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을 텐데 그 땅마저 밟아 볼 수 없다니…”라며 안타까워했다.

유족들은 15일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마주로 바닷가에서 위령제를 열었다. 출입이 어려운 콰절린 대신 마주로를 선택한 것이다.

“꿈에라도 조국 땅, 고향 땅에 돌아가 흙 한 줌 만져 보고 밟아 보고 싶었구나.”

남양 군도에서 할아버지를 잃은 임원희 씨(45)가 희생자의 마음을 담은 추도사를 낭독했다. 70여 년을 이어온 외로움이 한 번에 북받쳐 올라서였을까.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용봉 재단 이사장은 “희생자 앞에 이렇게 한잔 술을 올리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며 “아직도 군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일본에 진실을 알리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한을 풀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마주로에서 뜬 비행기는 다시 콰절린으로 향했다. “곧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에 박영옥 씨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아버지 가신 곳, 사진으로라도 남기려고. 땅을 한 번 밟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 더는 올 수 없겠지?”

마주로=박창규 기자 kyu@donga.com
#일제강점기#강제동원#추도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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