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大韓國人을 잊지 않았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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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적 받는 독립투사 김경천 장군-이위종 지사-이인 장관 후손 11명

‘가슴이 덜렁한다. 이등을 총살한 이는 안응칠 씨(안중근의 어릴 적 이름)라 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에게도 사람이 있구나!’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20년대 초 시베리아 설원에서 백마를 타고 독립군 부대를 지휘한 김경천 장군은 1909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하던 중 안중근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일기에 그 감격을 이렇게 적었다. 10년 뒤 장군은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을 보고 잠시 귀국했다 곧장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로 망명해 다시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는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독립군 가담 계기와 일본군 섬멸 과정 등 생생한 경험담을 기고했다.

제70주년 광복절을 열흘 앞둔 5일 김경천 장군의 후손 7명 등 특별귀화 대상자로 선정된 외국 국적의 독립유공자 후손 11명이 서울 중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법무부는 2006년부터 독립유공자의 후손 932명에게 선조들의 ‘국적’을 선물했다. 이번에 입국한 11명의 후손은 12일 대한민국 국적을 얻는다.

김경천 장군의 손녀 옐레나(54)·갈리나 씨(52) 자매는 자녀들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의사였던 아버지 김기범 씨(85)를 따라 자매도 모스크바에서 의사가 됐다.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할머니가 들려준 카자흐스탄 집단농장에서의 시련과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잊을 수 없었다.

1922년 시베리아에서 일본군이 철수하자 러시아군은 김경천 장군을 무장해제하고 다른 조선인들과 함께 1937년 카자흐스탄의 집단농장으로 쫓아냈다. 장군은 이듬해 민족주의자란 이유로 소련 정부에 체포된 뒤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안중근 의사의 부인이 러시아 한 마을에서 남편 없이 두 아들하고만 찍은 사진을 바라보던 옐레나 씨는 “우리 할머니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할 때 자녀 5명을 홀로 키웠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한국 국적을 받은 소감을 묻자 “할아버지의 소원은 독립된 조국에 사는 것이었다. 자손들이 한국 국적을 받았으니 이제 그 꿈이 이뤄진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함께 온 아들 에밀 군(17)은 안 의사가 ‘대한독립’ 혈서를 쓰기 위해 손가락 관절을 자른 ‘단지 수결’ 설명을 들으며 연신 자기 손을 쳐다봤다. 진지한 표정으로 기념관을 둘러본 그는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훌륭한 기념관을 가질 자격이 있는 분 같다”면서 “외증조부가 한국을 사랑했던 마음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적 취득자 중 최고령인 이위종 지사의 외손녀 류드밀라 씨(79)는 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와 함께 ‘동의회(러시아 내 항일의병단체)’ 활동을 한 할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하자 “(러시아)집에도 걸려 있다”며 함께 온 딸, 손자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이위종 지사는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만방에 밝힌 인물이다. 모스크바대 역사학 박사인 외증손녀 율리야 씨(46)는 “자랑스러운 선조가 있어 한국 역사를 배우는 것이 내 사명이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무료 변론했던 이인 초대 법무부 장관의 손자 이준 씨(50)는 프랑스에서 변호사로 성공했다. 후손들 중 유일하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그는 “한국 국민으로서 긍지를 느끼며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잊어가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김경천 장군의 손녀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했던 말로 짧게 답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조국#대한국인#독립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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