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미군폭격’ 국가배상 못받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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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피란선 참사’ 유족 소송 1심 기각
“국민 보호못한 정부 책임 있지만 진상규명뒤 3년 지나… 시효 만료”

“자, 모두 조금만 힘냅시다. 곧 땅에 내립니다.”

1950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인근 해상. 부산에서 출발한 피란민 350명을 태운 목선이 접안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부산의 한 학교에 수용됐다가 여객선, 화물선, 목선 등에 나누어 타고 경남 통영 욕지도를 거쳐 여수까지 항해한 지 13일째였다.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피란선에 올랐던 이춘혁 씨(당시 21세)도 ‘이제 다 왔다’며 뱃멀미에 시달리는 동생들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때 멀리서 전투기 4대가 목선을 향해 날아왔다. 앞선 전투기가 기관총 2발을 쏘자 뒤따른 전투기들이 목선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꼼짝도 못한 채 150명이 죽고 50명이 다쳤다. 미군 전투기가 손을 흔드는 피란민들에게 오인 사격을 퍼부은 것이었다.

지옥으로 변한 배 위에서 가족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이춘혁(85) 이춘송 씨(77) 형제는 55년이 지난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고 5년 후 ‘당시 피란민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됐다’는 진실 규명 결정을 받았다.

이 씨 형제는 지난해 9월 16일 “(희생자들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 피란선에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책임이 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판사 안승호)는 우선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의 불법 행위를 인정한다고 20일 밝혔다. 재판부는 “폭격의 주체는 미군이었지만 대한민국 정부 역시 미군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 자신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던 피란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당시 정부는 낙동강 전선의 전황이 긴박해져 부산으로 피란민이 쇄도하자 병참기지인 부산의 혼잡을 막기 위해 피란민을 대거 남해안 도서로 분산시켰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씨 형제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나 손해를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부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이 씨 형제가 소송을 낸 시점이 과거사위가 ‘여수 폭격사건’에 대해 진상 규명 결정을 내린 2010년 6월 30일로부터 3년이 지나 손해배상채권의 소멸시효가 만료됐다며 이 씨 형제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 씨 형제는 시효 완성일로부터 75일이 지나 소송을 냈다. 이 씨 측 변호인은 진실 규명 결정 통지를 받은 10월 4일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과거사 국가배상 사건에 3년의 소멸시효를 엄격히 적용하면서도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예외를 허용하고 있어 항소심에선 어떤 판단이 나올지 주목된다. 지난해 목포지원은 ‘1951년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의 유가족들이 소송을 뒤늦게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감안해 과거사위 진상 규명 결정이 있은 지 4년이 지나서 낸 소송을 받아들였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6·25 미군폭격#국가배상#여수 피란선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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