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관광해설사 조인찬씨 “손으로 세상을 보여드릴게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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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들에게 창덕궁 안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덕궁 부용지에서 시각장애인 문화관광해설사 1호인 조인찬 씨(오른쪽)가 관광객들의 손을 돌에 새겨진 잉어 문양으로 이끌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덕궁 부용지에서 시각장애인 문화관광해설사 1호인 조인찬 씨(오른쪽)가 관광객들의 손을 돌에 새겨진 잉어 문양으로 이끌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흰 지팡이 끝이 붉은 나무 문 모서리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단청 아래에 닿은 지팡이는 다시 오른쪽으로 옮겨가며 그림 그리듯 가장자리를 따라갔다. 지팡이를 내린 관람객이 “와, 문이 정말 크네요”라며 감탄했다. 조인찬 씨(60)는 신이 나서 “그 유명한 창덕궁 후원으로 통하는 문 아닙니까. 여기 손잡이도 한 번 만져보세요. 열지는 마시고”라고 말했다. 관광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각장애인의 날(15일)을 닷새 앞둔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덕궁. 제약사인 한국노바티스가 초청한 35명의 시각장애인이 조 씨의 안내로 궁을 관람했다. 문화관광해설사인 조 씨도 1급시각장애인이다.

○ 시력과 함께 무너진 삶


조 씨는 1988년 9월 실명을 유발하는 원인 불명의 질병인 황반변성 진단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1급시각장애인 판정’이 나왔다. 조금씩 시력이 사라지면서 이전의 삶을 잃어갔다. 24년간 운영해온 고압가스 제조업체를 정리했다. 사정을 모르는 예전 거래처 사람이 “잘나가더니 이제 사람을 보고도 인사도 안 한다”며 뒤에서 헐뜯었다. 하루는 노숙인이 구걸하려고 내민 손을 지인이 인사하는 줄 알고 잡고 흔들기도 했다. 점차 집 안에만 틀어박혔고 화가 나면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던졌다. 우울증이 와서 아침부터 집을 나가 밤늦게까지 무작정 걸었다. 육교를 건널 때면 아래를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며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 다시 꿈을 품다

문화관광해설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2011년 봄이었다. 종로구청에서 모집공고가 났다. 구에서 제공하는 6개월간의 교육과정과 현장실습을 통과하면 시각장애인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인정해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죽지 않으려면 세상과 교류를 해보자.’ 다시 한 분야의 전문가로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싶었다. 곧바로 지원서를 냈다.

시각장애인 중에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많다. 활자화된 정보를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머릿속에 외우고 되살리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조선 왕들의 앞 글자를 딴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우는 중에도 그 장점은 빛을 발했다. 앞이 보이면 궁궐의 문패나 설명문을 보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앞이 안 보이니 문들의 순서와 위치, 어디에 가면 어떤 조각들이 있는지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어야 했다. 조 씨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세 궁궐과 종묘의 구석구석을 걷고 만지며 모두 외웠다.

4개월간의 강의가 끝나고 2011년 7, 8월 현장실습에 접어들 때 함께 시작한 동기 중 절반 이상이 힘들어서 그만뒀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땡볕 아래서 더듬더듬 궁궐 문과 바닥을 짚어보다 오면 잠자리에서 몸살이 났다.

9월 마지막 실습을 마쳤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시각장애인 문화관광해설사 1기’라고 적힌 인증서를 받았다. 아내가 꽃다발을 들고 왔다. 처음 등록한 20명 중 최종 합격생은 5명뿐이었다.

○ ‘궁궐 만들기’

시각장애인 문화관광해설사는 2011년 종로구청에서 양성한 이 5명이 시작이었다. 지난해 이들이 안내한 횟수만 101건, 시각장애인 450명에 달했다. 많이 참여한 이는 일주일에 두세 번꼴로 가이드를 해준 셈이다. 구는 회당 활동비 3만5000원을 이들에게 지원한다. 종로구청 관광체육과 주정하 주무관은 “처음 시작했을 때 이렇게까지 시각장애인 가이드 수요가 높을 줄 몰랐다. 그동안 문화적으로 소외됐던 이들이 밖으로 나오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며 “내년에는 좀더 큰 규모로 2기를 양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 씨는 시각장애인 관광객들을 궁궐 문 아래에 세워주고 흰 지팡이를 위로 직접 뻗어 보게 한다. 시각장애인들은 손이 닿지 않아 만질 수 없는 크고 높은 물체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조 씨는 그 답답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들의 손이나 지팡이를 자꾸 대어보고 이끌어 주는 것이다. “지팡이를 다 뻗은 것보다 1m 더 높은 크기” “이 보폭으로 다섯 걸음 길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게 조 씨의 해설 방식이다.

조 씨는 이들에게 ‘만져보고 듣고 그려보는 관광’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시각장애인 가이드 모임 이름은 ‘궁궐 만들기’예요. 왜냐하면 우린 궁궐을 보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만들고 기억하기 때문이죠.”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시각장애인#조인찬씨#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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