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대학생들 두번 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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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통역-수강 돕는 도우미 학생 일부 대충대충하고 月 30만원 장학금 챙겨
농아대학생聯 “관리시스템에 문제”
학교 지원 부족해 자퇴하기도

서울 종로구 재동의 골목에서 한국농아대학생연합회 회원들이 수화로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수진(25·상명대 4), 김혜지(22·나사렛대 3), 이재정(23·한성대 4), 임보미 씨(22·동덕여대 3). 수화통역을 맡은 김혜지 씨만 청각장애인이 아니다. 농아 대학생들은 김 씨처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청인’이라고 부른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서울 종로구 재동의 골목에서 한국농아대학생연합회 회원들이 수화로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수진(25·상명대 4), 김혜지(22·나사렛대 3), 이재정(23·한성대 4), 임보미 씨(22·동덕여대 3). 수화통역을 맡은 김혜지 씨만 청각장애인이 아니다. 농아 대학생들은 김 씨처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청인’이라고 부른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피아제가 한 실험에서 물감 뭐하고 뭐하고 섞으면/되겠는데 어떻게 찾아내냐면 ㅗ기했는니?/시행착오적인 문제해결 접근을 ㅏ게된다면/ 에이하고, 비하고 체계적으로 계획을 하고 문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고….’

한국농아대학생연합회(농대연)의 A 씨는 얼마 전 강의시간에 도우미를 통해 위와 같은 문자통역을 받았다. 문자통역은 소리를 못 듣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강의 내용을 노트북 타자로 쳐 주는 방식. A 씨는 통역 내용으로는 도무지 강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농대연은 1999년 생긴 단체. 농아 대학생 500여 명이 회원인데 성의없는 문자통역으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호소하고 있다.

○ 도우미 교육 미흡한 현실

장애대학생 도우미는 지체장애인의 외출을 돕거나, 청각장애인을 위해 통역을 한다. 주로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 중에서 뽑는다. 정부와 대학의 지원으로 활동비를 받으며 봉사시간도 인정된다.

수화통역사나 속기사가 아닌 일반 도우미에겐 한 달에 최대 30만 원을 장학금 등의 명목으로 지급한다. 봉사시간은 대학별로 결정한다.

청각장애인은 주로 문자통역 서비스를 받는다. 동덕여대에 다니는 청각장애인 임보미 씨(22·여)의 경우, 같은 학과 친구들이 도우미로 나서 문자통역을 한다. 임 씨는 “전문 통역사가 아닌 친구들이 통역하다 보니 느리고 부정확할 때가 많다. 친구들이 타자를 치다가 놓치는 내용은 나도 놓친다”고 말했다.

도우미가 사명감을 갖고 성실히 하면 그나마 낫지만, 일부 그렇지 않은 사례가 있다. 임 씨는 “단순히 활동비를 받으려고 통역을 해 주면서 수업 끝나면 땡이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임하는 도우미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농대연 소속의 다른 학생은 “통역을 맡은 도우미가 수업 도중에 개인적인 약속이 있다며 5, 6차례나 자리를 떴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그는 3시간이나 되는 전공수업 중 1시간 반만 통역을 받았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한성대 학생인 이재정 농대연 부회장(23·여)은 “도우미에 대한 교육과 관리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물론 대학에서 도우미를 대상으로 교육을 하기는 한다. 장애 대학생 도우미 지원 사업을 하는 대학은 도우미와 장애 학생에게 학기별로 1시간 이상 사전 교육을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 보통 단체로 교육하지만, 장애 학생이 10명 미만인 대학에선 개별 교육도 가능하다. 그러나 농아 대학생들은 교육을 형식적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장애 학생이 적은 곳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다고 말한다.

이 부회장은 “어떤 대학의 담당자는 도우미들에게 참고 자료도 주지 않고 장애 학생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된다고만 얘기했다. 어떻게 도우면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듣지 못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활동하는 도우미가 있다”고 말했다.

○ 장애인의 특성과 고충 좀 더 이해해야

농대연은 도우미 활동을 하려면 장애의 특성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청각장애인은 상대방의 입 모양을 읽으며 말뜻을 파악한다. 큰 소리로 말해 주기보다는 천천히 말하며 입 모양을 보여 주는 게 좋은 이유다.

청각장애인이 보청기를 착용했다고 해서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한다. 대화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서 내용을 이해한 것은 아니니 한 번 더 설명하는 식이 효과적이다.

주의해야 할 사항도 있다. ‘일반인’이나 ‘귀머거리’ ‘불구자’와 같은 표현은 써선 안 된다. 청각장애인이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너 청각장애인 아니지?”라고 물어도 곤란하다. 당사자에겐 불쾌하고 민감한 질문이다. 또 수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에게 “왜 구화(말)를 더 잘 익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느냐”라고 질책하면 안 된다.

상명대에 다니는 청각장애인 김수진 씨(25·여)는 “도우미와 장애 학생 사이에 종종 갈등이 생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학교에서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했다. 한 살 때 청력을 상실한 그는 지난해에 농대연 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학교의 교육 지원 체계가 부실해 자퇴를 택하는 농아 대학생을 종종 봤다고 한다.

김 씨는 대학과 정부가 장애 학생의 교육뿐 아니라 취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강이나 취업 프로그램에 도우미의 통역 지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다.

예산 한도가 정해져 있기에 상당수 대학에서는 도우미가 정규 수업시간 외에는 통역을 해주지 못하는 점도 문제다.

김 씨는 “우리도 취업을 준비하고 진로를 고민하는데 취업 프로그램에서 소외될 때가 많다”며 “이런 까닭에 농대연이 자체적으로 대학생을 모아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청각장애인#도우미#장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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