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환에 몸 맡긴채 겨울바다와 5시간 사투끝 “살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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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침몰 제주 갈치잡이 배… 中 선원의 기적같은 생환기

“불이야.” 18일 오전 3시 40분 제주 서귀포시 남쪽 720km 해상에 닻을 내린 서귀포선적 갈치잡이 어선 3005 황금호(29t). 어둠 속에서 갑자기 다급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선실에서 잠을 자던 중국인 선원 장룽후이(張榮輝·42) 씨가 눈을 떴을 때는 동료 선원 6명이 문을 박차고 나가는 중이었다. 속옷만 입고 나간 장 씨는 물동이를 들고 불이 난 선미로 달려갔다. 하지만 매캐한 연기가 코와 입으로 사정없이 들어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질식해 죽을 것 같아 근처에 있는 구명환(튜브 모양의 구명부이)을 잡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에서 심호흡을 했지만 4m가 넘는 집채만 한 파도가 사정없이 내리쳤다. 물속으로 가라앉았다가 뜨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면서 불길에 휩싸인 황금호와 멀어져 갔다. 동료 선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고향인 중국 산둥(山東) 성 주청(諸城) 시에 남겨진 가족이 스쳐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14, 6세), 그리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아내(41)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실낱같은 희망의 끝을 부여잡은 장 씨는 조류에 하염없이 밀려갔다. 겨울 바다의 한기가 뼛속으로 느껴졌다. 당시 수온은 18도가량. 파도 속에 잠길 때는 죽음의 공포가, 수면 위로 뜰 때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수없이 교차했다. 물속에 잠긴 하체는 감각이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눈꺼풀이 내려오며 죽음의 그림자가 휘감았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보였다. “주워(救我), 주워.” 목이 터져라 살려달라고 고함쳤다. 하지만 어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분을 소리 지르다 포기했다. 마지막 외마디를 위해 체력을 남겨둬야 했다. 그때 누군가 잡아끄는 느낌이 들었다. ‘아, 저승사자가 나를 끌고 가는가. 이제 마지막이구나.’ 몸이 흔들리며 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 어선에 몸이 올려져 있었다. 사고 지역 인근에서 조업하던 어선이 오전 9시경 장 씨를 발견해 배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바닷속에서 5시간여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맞은 기적적 회생이었다. 보통 사람은 21도 이하의 차가운 물에 빠졌을 때 1시간 내에 저체온증에 빠질 수 있으며, 몇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장 씨의 생환은 기적적인 일로 여겨진다.

19일 제주대병원으로 이송된 장 씨는 20일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악몽 같았던 5시간의 기억을 복기하면서 “사고 당시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물로 뛰어들었다. 다리 통증이 심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졌다. 빨리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장 씨는 중국에서 공장노동자, 운전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지난해 ‘코리안 드림’을 찾아 제주에 왔다. 선원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 씨는 “더는 배에서 일하기 힘들 것 같다”며 몸서리를 쳤다.

2일 서귀포항을 출항한 갈치잡이 어선 황금호는 화재 발생 3시간 40분 만인 18일 오전 7시 20분경 연기에 휩싸인 채 침몰했다. 해양경찰 소속 항공기인 챌린저호가 사고 현장으로 출발했고 3000t급 구난함도 출동했다. 사고 현장 주변 어선 10여 척이 구조작업에 나섰고 일본, 중국의 군함도 지원했다. 당시 황금호에는 한국인 선원 7명, 중국인 선원 2명 등 9명이 타고 있었다. 어선들이 주변에서 찾은 선원 4명은 모두 숨진 상태였다. 20일에는 해군 함정이 숨진 선원 1명을 추가로 발견했다. 나머지 3명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갈치잡이#구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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