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ISSUE]“소고기 실컷 먹어보자” 갈망하는 한국인 심리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4일 03시 00분


코멘트

개콘 ‘어르신’ 코너 계기로 본 ‘소고기 소비자=부자’의 역사

소고기가 귀하던 시절 어르신들은 부의 상징이던 소고기 한번 실컷 먹는 게 소원이었다. 소고기가 흔해진 지금도 우리는 습관처럼 소고기를 갈망하며 산다. 소고기는 한국인에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부의 상징이자 삶의 애환이 담긴 문화적 코드다. 2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직장인들이 소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소고기가 귀하던 시절 어르신들은 부의 상징이던 소고기 한번 실컷 먹는 게 소원이었다. 소고기가 흔해진 지금도 우리는 습관처럼 소고기를 갈망하며 산다. 소고기는 한국인에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부의 상징이자 삶의 애환이 담긴 문화적 코드다. 2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직장인들이 소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손자가 명문대에 합격했다면서요?”라고 동네사람이 묻자 동네 ‘왕어르신’은 세상만사를 초월한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명문대 다 필요 없는 기라. 명문대 들어가면 뭐하겠노.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중략) 열심히 공부해가 대학원 들어가면 뭐하겠노.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KBS ‘개그콘서트’의 ‘어르신’ 코너에서 왕어르신으로 등장하는 개그맨 김대희 씨는 말끝에 늘 “소고기 사먹겠지”란 대사를 붙인다. 추석 때 가족들이 다 내려오면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먹고, 빌라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한 다음에 집들이를 할 때도 역시 기분 좋다고 소고기를 사먹는다는 식이다. 그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좋은 일은 늘 소고기를 사먹으며 축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혹자는 이를 단순한 유행어로만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무슨 일이든 “소고기 사먹겠지”라는 말로 귀결되는 이 유행어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고기에 대한 애착과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것이다. 김대희 씨 역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르신의 입장에서 ‘부(富)’의 표현을 ‘소고기를 먹는다’는 말로 대신했다”고 말한 바 있다. 무심한 듯 말하지만 소고기 사먹는 일에 유난히 집착하는 왕어르신처럼, 우리나라의 많은 ‘어르신’은 부의 상징인 소고기를 갈망하며 살았다. 오늘날 소고기는 과거보다는 사먹기가 쉬워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의 상징이자 누구나 갈망하는 대표적인 음식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60, 70년대, 소고기를 갈망하다

“1974년인가, 누가 신문지로 포장한 물건을 맡기더니 소고기를 600원어치(당시 한 근)만 달래. ‘그 안에 좋은 밥상이 들었으니 시장 다 보고 다시 와서 소고기 값 치르고 찾아가겠소’ 하기에 믿고 고기를 싸줬지. 그런데 안 와. 혹시나 해서 신문지 포장을 풀어보니까 다 부서진 낡은 상이 들어있지 뭐야. 당했구나 싶어 분했는데 또 생각해보니 얼마나 소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나 싶기도 하고…. 우리 가게 근처에 있던 다른 정육점은 아침에 문을 열어보니까 밤사이에 누가 소고기만 다 훔쳐갔더래. 그때는 그런 일이 많았어. 소고기가 그렇게 귀한 시절이었거든.”

서울 종로구 통인동 통인시장에서 38년째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는 정해청 씨(56)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1960, 70년대 가회동 통인동 등 종로구 일대 부촌에 거주하던 부자들은 1, 2주에 한 번씩 소고기를 배달시켜 먹었다. 그러나 서민들 대부분은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 명절이나 돼야 소고기 맛을 보는 게 전부였다. 경남 창원에 사는 김복덕 할머니(81)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명절 되면 읍내 가가꼬 다들 가진 돈만큼 ‘소고기 얼마치 주소’ 카는데 그때 ‘소기름도 덤으로 좀 많이 주소’ 그랬다꼬. 집에 와가 큰 가마솥에 물 한가득 넣고 소고기도 넣으면 고기가 쪼매밖에 안 돼서 보이지도 않거든. 거기다 소기름을 넣으모 그래도 소고기 국물 맛이 난다꼬. 기름도 둥둥 뜨고. 그거를 온 식구가 좋다고 들이켰다 아이가. 운 좋게 국그릇에 소고기 한 점 들어가 있으면 그 씹는 맛이 얼매나 좋았는지 모른다.”

1970년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의 연간 소고기 소비량은 1.2kg(지난해 기준 10.7kg)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서민들이 얼마나 소고기에 굶주린 상태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만큼 소고기에 대한 갈망이 강했을 거란 사실도 짐작해볼 수 있다.

소고기가 ‘그림의 떡 중의 떡’이자 ‘부의 상징’이었던 탓에 소고기와 관련된 사건도 많았다. 1962년 육군 대령 계급장을 단 남성이 서울 성북구의 정육점에 나타났다. 남자는 “소고기 60근을 달라”고 한 뒤 미리 대기시켜 둔 택시에 싣고 달아났다. 1965년 3월 1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경기 양주에 살던 박모 씨는 이웃의 부탁을 받고 소고기를 사온 다음 고기를 만진 손을 간장 항아리에 담가 씻어냈다. 비싼 소고기 대신에 소고기 맛을 내는 간장이라도 먹기 위함이었다.

1970년에는 늙거나 병든 말을 밀도살한 다음 소고기로 속여 정육점에 팔았던 일당이 붙잡혔다. 한국부인회 등 5개 여성단체는 1967년 소고기 값 인상에 격분해 ‘소고기 안 사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58년에는 피(血)를 팔아 번 돈으로 소고기를 사 들고 오던 10대 학생을 때리고 고기와 금품을 빼앗으려던 일당이 국민의 공분을 샀다. 1969년에는 군화 제조용으로 수입한 소가죽에 붙어 있던 폐품 소고기를 긁어내 시중에 팔아넘긴 일당이 붙잡혔다. 유독물이 묻는 소고기는 잘게 썰려 고기에 굶주렸던 지게꾼과 노점상의 입으로 들어갔다.

소고기 맛, 싸게 느껴보세요

한국은행에 따르면 1970년 당시 국내 제조업 상용근로자의 월평균 급여는 1만4301원이었다. 그러나 당시 20, 30대를 보낸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것도 번듯한 직장이어야 가능한 일이지 실제로는 한 달에 5000∼6000원밖에 못 벌던 사람이 허다했다”고 말한다. 1970년 당시 소고기 한 근의 가격은 500∼600원 정도. 월급의 10분의 1을 털어야 소고기 한 근을 맛볼 수 있었다. 서민들은 ‘영양 보충을 위한 최상의 음식’이라 여겼던 소고기에 늘 목말라했다.

이런 목마름을 해결해 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소고기라면’이었다. 1970년 10월 삼양식품은 소고기를 수프 원료로 넣은 ‘쇠고기면’을 내놓았다. 제품명에 당당히 ‘쇠고기’가 들어가고 포장지에 그려진 커다란 소가 온몸으로 ‘쇠고기가 재료임’을 알리는 이 라면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삼양식품은 1997년 북한 동포 돕기의 일환으로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라면을 보낼 때 20여 종류의 제품 중 유독 쇠고기면을 택했다. 당시 생산하던 라면 중 70% 이상에 쇠고기 수프가 들어갔지만 굳이 쇠고기면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최남석 삼양식품 홍보실장은 “우리나라의 1970년대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북한 주민들이 이왕이면 포장지에 ‘쇠고기’라는 글자가 적힌 라면을 보고, 그 국물 맛이라도 보면서 포만감을 더 크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삼양식품과 같은 시기에 농심(당시 롯데공업주식회사)도 소고기라면을 내놓았다. 10% 미만이었던 농심의 시장점유율은 소고기라면 시판 이후 1년 만에 23%까지 올라갔다. 농심 홍보팀의 윤성학 차장은 “당시 회사가 어려웠는데 소고기라면 하나 덕분에 1년 만에 매출이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며 “소고기라면을 내놓자마자 농심이 일어섰다는 것은 당시 소고기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한국인은 왜 소고기에 열광하나

“조선시대에는 소의 식용이 일부 이뤄지기는 했으나 소는 농사를 짓는 대표적인 가축이었기 때문에 식용을 위한 소의 양육은 매우 제한되었다. 왕실의 제사나 잔치 등 특수한 경우에 소의 식용이 이뤄졌다.”(‘조선평전’,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전문가들은 조선시대에 소 도축은 물론이고 식용을 극히 제한했던 것이 이후 소고기에 대한 열망을 자극한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성균관 인근 마을인 반촌(泮村)의 노비들은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왕실에서 큰 행사를 한 뒤 남은 소고기를 들고 나와 청계천 등에서 비싼 값에 팔았다. 조선시대의 공문서식 용례집인 유서필지(儒胥必知)는 서민들이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는 “유서필지에 따르면 소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거나 심한 병이 난 경우 등 극히 제한된 때에만 관청의 허가를 받고 고기를 취할 수 있었다”며 “소를 잡거나 소고기 먹는 것을 금지할수록 소수의 특권층만이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인 소고기에 대한 서민들의 욕망이 강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들이 소고기 사먹는 일이 조금이나마 수월해진 적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군수물자로 쓸 소가죽을 확보할 목적 등으로 식용 소 사육을 장려했다. 이로 인해 1935년 국내의 소 사육두수는 168만 마리에 이르렀다. 도축 역시 조선시대보다 한층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한우가 일본으로 공출돼 가면서 다시 ’소고기 암흑기‘가 찾아왔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소 사육두수가 60만 마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 수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40만 마리로 급감했다.

소고기는 다시 조선시대처럼 서민이 구경도 할 수 없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1950년대 말부터 소 사육두수가 100만 마리 이상으로 늘었지만 경제가 회복되지 못해 서민들이 소고기 먹는 일은 더 힘들어져 갔다”며 “빈부격차가 커지고 1970, 8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소위 ’가든‘이라 불리는 소갈비 집이 생겨나면서 소고기는 부자가 되거나 성공을 해야만 먹을 수 있는 부의 상징이란 인식이 점점 더 확고해졌다”고 말했다.

그래도 ‘소고기 사먹겠지’

2010년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소고기 소비량이 처음으로 10kg을 넘어섰다. 지난해에는 10.7kg을 기록했다. 소 사육두수는 올해 9월 말 현재 356만 마리까지 늘어났다.

이제 소고기는 가장 비싼 음식도, 영양학적으로 따라올 것이 없는 최상의 음식도, 명절에나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소고기를 사라”고 한다. 또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소고기 사먹으러 가자”고 기분 좋게 말한다. 엄진숙 씨(31·여)는 영국에서 유학할 때, 당시 그리 좋지 않았던 집안 형편이 궁금해 한국에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는 “우리 집 이제 소고기 먹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집안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는 것을 전했다.

예전보다 소고기가 풍족해진 시대.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이 ’소고기 노래‘를 부르는 이유, 여전히 ‘소고기’를 부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유는 뭘까.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오랜 세월과 역사를 거쳐 소고기는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돈을 많이 벌거나 성공했을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먹는 가장 특별한 음식’이라는 상징으로 한국인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고 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소고기에 가장 굶주리고 자란 베이비부머(1955∼63년생)의 20, 30대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소고기 문화’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무리 소고기 가격이 급락하더라도 ‘소고기는 선망의 대상’이란 인식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고기 사먹겠지’라는 말이 반복될 때 시청자들은 웃는다. 어떤 이는 이를 소고기가 다소 흔해진 지금도 여전히 소고기에 집착하는 ‘왕어르신’이 촌스러워 웃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유행어의 이면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소고기에 얽힌 애환과 문화적 코드’를 발견하고 그것에 공감하기에 미소를 짓는 것은 아닐까.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