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 10일 오후 10시 서울 중구 을지로의 한 빌딩 앞. 지인들과 스크린골프를 치고 귀가하던 동대문 케레스타 상가 임차인 연합회 의장 박모 씨(56)는 순식간에 건장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였다. 과거 케레스타 상가를 경비했던 용역업체 ‘디디(DD)’ 대표 최모 씨(53) 등 4명은 “상가 관리권을 다른 업체에 넘기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며 박 씨 등을 주먹과 발로 무차별 폭행했다. 하루 7000여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찾고 유동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한국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부각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정재 법’이 횡행하는 동대문 패션타운의 그늘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 동대문의 밤을 지배했던 ‘이정재 법’
경찰과 인근 상인들에 따르면 동대문 일대 상가의 경비 용역업체는 DD 사례와 같이 지역 조직폭력배와 연계된 ‘깡패형 용역’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합법적 계약보다 힘 싸움이나 위력 과시를 통해 상가 관리권을 강취하는 등 불법을 자행해 왔다. 동대문 상인들은 오로지 힘의 논리로 결정되는 경비 용역 시스템을 ‘이정재 법’이라고 불러왔다. 이정재는 1950년대 정치깡패 전성시대의 상징적 인물로 동대문 일대 상가 관리권 등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31개 대형 상가와 3만5000여 개의 도·소매 점포가 밀집한 동대문 패션타운은 24시간 영업을 계속하기 때문에 경비 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각 점포는 규모와 위치에 따라 월 30만∼60만 원의 관리비를 상가 관리단에 지불한다. 관리단은 용역업체를 선정해 상가 경비를 일임한다. 1000여 개 점포가 입점한 케레스타의 경우 경비 사업에만 연간 30억 원 이상을 지출했다. 동대문 일대 경비 용역 사업 규모는 연간 1800억 원을 웃도는 것으로 추정된다.
용역들은 상가 관리 사업권 사수를 위해 상인 연합 총회에서 폭력을 행사하고 의안 날치기를 주도하는 등 최근까지도 활개를 쳤다. 2009년에는 동대문 서평화시장에서 상가 관리권 이전에 맞선 용역 직원들이 건물을 점거한 채 화염병을 던지고 화염방사기를 발사하기도 했다. 동대문에서 15년째 장사를 했다는 신영우(가명·52) 씨는 “동대문 패션타운이 관광특구로 지정된 2002년 무렵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상가를 소위 ‘깍두기’(‘깡패형 용역’을 지칭하는 은어)들이 관리했다고 보면 된다”며 “관리비를 체납한 상인이 장사를 할 수 없도록 괴롭히고 목이 좋은 점포는 새 주인에게 뒷돈을 받고 협박해 강제로 내쫓기도 했다”고 말했다.
○ 집중 단속으로 횡포는 줄어들었지만…
경찰은 상가 관리권을 둘러싼 용역 폭력을 동대문 치안 최대의 불안요소로 보고 지난해 8월부터 집중 단속을 벌였다. 서울 중부경찰서는 지난해 8월 용역 20여 명을 동원해 동대문 디오트 상가 관리인과 상인연합회장을 폭행한 혐의로 구 디오트 쇼핑몰 대표 황모 씨 등 22명을 불구속 입건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같은 해 9월에도 동대문 테크노상가에서 새 관리단 구성을 위한 임시총회에 개입해 폭력을 행사한 용역 1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한 동대문 상가 관계자는 “과거 민사 사안임을 이유로 개입을 꺼렸던 경찰이 용역의 불법 폭력을 집중 단속하면서 용역업체들이 ‘동대문에서는 더 장사하기 힘들다’며 빠져나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경찰은 최근까지도 일정 숫자 이상의 경비 용역들이 모여들어 위압감을 조성하거나 상인들을 위협할 조짐을 보이면 즉시 현장에 출동해 충돌을 방지하고 있다. 문신을 새기거나 체격 조건이 좋은 용역직원은 사진자료로 남겨 ‘계보화’해 관리한다. 박명수 서울 중부경찰서장은 “동대문 일대에는 대형 상가가 31곳이나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용역 폭력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며 “앞으로도 강력한 단속을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4월 DD 사건과 관련해 서울 중부경찰서는 최 씨 등 4명을 폭행 혐의로 구속하고 폭행을 지시한 구 케레스타 관리단 대표 김모 씨(54)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12일 밝혔다. 경찰은 용역업체 사무실에서 발견한 액화석유가스(LPG)통 12개와 가스총, 쇠파이프 7개, 쇠몽둥이를 압수했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박 씨가 새 상가 관리업체에 경비용역 사업을 넘기려고 해 보복폭행을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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