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8년 전 407억 포함 잇따라 로또 당첨자 낸 춘천 중앙로 복권판매점의 ‘대박 스토리’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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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 전철 타고 행운 사러 오네요”


《또 손님이 밀려든다. 터치스크린을 두드리느라 손가락이 아프다. 강원 춘천시 중앙로에서 복권가판점을 운영하는 김모 씨(59·여)의 하루는 늘 고단하다. 가로 1.8m, 세로 1.5m, 높이 1.9m의 공간에 갇혀 매일 똑같은 일을 한다. 돈을 받고 복권을 내준다. 아니, 행운을 판다고 해야 하나. 문을 닫을 때까지는 10분도 쉴 틈이 없다. 그래도 다 돈이 아닌가. 복권 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옷차림이 수수하다. 그렇겠지. 부자들이 복권을 사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손님들의 표정은 밝다. 당첨의 꿈 때문이리라. 그랬으면 좋겠다. 407억 대박 행운이 이들에게도 이뤄졌으면 좋겠다.》

#1. 운명의 2003년, 대박 복권 팔고 대박 났다

2003년 4월 12일 누군가의 인생이 바뀌었다. 19회차 407억2295만 원의 초대박 로또복권이 당첨된 날. 당첨금이 한 차례 이월된 데다 당첨자가 1명이었다. 전국이 로또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 복권은 당첨자인 경찰관(47)의 운명을 바꿨겠지만 김 씨의 인생도 바꿔놓았다. 언론과 인터넷은 김 씨가 운영하는 복권가판점을 집중 조명했다. ‘명당’으로 뜬 것이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에 복권을 사러 몰리는 손님들에 정신이 없었다. 거액 당첨금 소식은 로또 열풍으로 이어졌고 김 씨의 가게 앞은 장사진을 이뤘다.

“말도 마세요. 대단했지. 액수가 워낙 컸으니까. 당첨자도 좋았겠지만 나도 감사하지. 우리도 대박이 났잖아.”

407억 원 당첨금이 나온 다음 날부터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손님이 밀려들었다. 이전까지 당첨금 8000만 원의 주택복권 1등 당첨이 두 차례 나오기는 했지만 장사에 큰 영향은 없었다. 간판도 ‘1등 407억 당첨판매점’으로 바꿨다. 407억 원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국내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로또 1회부터 26일 469회 추첨까지의 1등 평균 당첨금이 21억6695만 원인 것을 감안하면 19명의 당첨금과 맞먹는 액수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이월된 당첨금 추첨이 있던 10월 22일(토요일) 오후에는 줄을 50m도 넘게 섰다. 복권 찍어내기에 ‘달인’인 그가 5초 만에 복권을 내줘도 줄은 줄지 않았다. 그날은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손님이 아니라 웬수’라는 말이 나올 법했다.

얼마나 팔까. 김 씨는 “억” 소리를 내뱉는 듯하다가 말을 다시 삼킨다. 그러다 “영업 기밀”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2. 심심풀이로 시작한 일이 천직으로

김 씨는 1987년 이곳에서 주택복권을 팔기 시작했다. 두 아들의 학원비라도 벌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다. 또 서른다섯 살의 주부로 지내기에는 생활 자체가 무료했다. 말 그대로 심심풀이로 벌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가족도 ‘복권 아줌마’가 되는 걸 반기지 않았다.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잘하지.” 그렇게 말하는 남편을 힘겹게 설득했다.

처음 하는 일이라 부끄럽기도 했다. 다행히 밖에서는 판매점 안이 잘 안 보였다. 그래서인지 단골들도 김 씨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 복권을 건네는 김 씨의 손만 그들에게 익숙할 뿐이다. 하루 종일 비좁은 공간 속에 갇혀 지내는 것이 답답했다. 지금처럼 손님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시간도 더디게 흘렀다.

어느새 24년이나 흘렀다. 이 장사로 두 아들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큰 굴곡이 없었던 것을 보면 복권 파는 일 자체가 그에게 복(福)이었던 모양이다. 김 씨는 이곳에서 손바닥 한 뼘 크기의 아크릴 창을 통해 손님과 소통한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쉬는 날이 없다. 오전 9시에 나와 오후 9시에 퇴근하니 중노동 중에 중노동이다. “오늘은 뭘 먹어야 하나…” 점심 저녁 두 끼를 모두 배달시켜 비좁은 공간에서 해결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손님 탓에 매번 식어버린 밥이랑 찌개가 단골메뉴다.

#3. 천태만상 복을 바라는 서민들

김 씨에게는 단골이 많다. 주로 2002년 로또복권 탄생 이후 생겨난 단골이다. 1회 때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찾아오는 손님만 해도 50여 명이다. 전화로 특정 시간대 로또 복권 발행을 부탁하고 매주 찾으러 오는 손님들도 있다. 지난해 2차례 로또복권 1등 당첨이 나오고 12월 경춘선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손님은 더욱 늘었다. 판매점이 닭갈비 골목이 있는 춘천명동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주말이면 관광버스를 타고 온 단체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407억 당첨’ 간판을 보고 오는 손님도 많다. 서울에서 온 한 남자 손님(48)은 “등산을 왔다가 닭갈비를 먹고 지나는 길에 간판을 보고 복권을 샀다”고 했다. 이 점포 단골이라는 다른 남성(54)은 “지난해 1등 당첨이 또 나온 뒤부터 이곳에서 매주 복권을 사고 있다.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고 했다.

여성들은 보통 복권을 잘 사지 않지만 김 씨의 점포에는 여성 손님이 많은 편이다. 다른 점포는 80% 이상이 남성이지만 이곳에는 여자 손님 비율은 40% 정도나 된다. 손은 남자 손님이 크다. 1인당 한도인 10만 원어치를 사는 손님은 대부분은 남성이다. 가끔은 1000원씩만 구입하는 짠돌이도 있지만 남자들은 보통 5000∼1만 원어치를 구입한다. 여성은 3000원 안팎으로 구입하는 손님이 많다고 한다. 왜 그럴까. “글세… 이유는 잘 모르지. 주부니까 아껴 쓰려고 하는 거 같은데… 복권 사는 돈도 조금 아끼려는 것 아니겠어요.”

복권을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민이다.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다. 김 씨의 점포를 찾는 사람은 어림잡아 1주일에 5000∼7000명.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지만 명당 점포의 명성을 지켜주는 이들이다. 그래서 너무 고맙다. “돈 많은 사람이 복권 사겠어요. 어려운 사람이 많이 당첨됐으면 좋겠지만 복이 어디로 굴러갈지….”

407억 원 당첨자에 대한 마음은 더 각별하다.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하다. 혹시 몰래 다녀가지는 않았을까. “나 같아도 안 오겠지. 소문을 들으니까 돈 허투루 안 쓰고 잘산다고 하데요. 어떻게 생긴 분인지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 나랑은 보통 인연이 아닌데….”

지인에 따르면 당첨자는 수도권에서 중소기업을 인수해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당첨 직후 경찰서에 사표를 내고 온 가족이 잠적하다시피 사라진 그였다. 당첨자는 당시 세금을 제하고 받은 당첨금 317억 원 가운데 35억 원가량을 장학금과 복지재단을 만드는 데 내놓아 통 큰 기부로도 화제를 모았다. 은행의 철저한 재태크 도움과 자기 관리 덕에 당첨금이 훨씬 불어났다는 소문이다. 복은 복을 부르는 모양이다.

#4. 인근 판매점까지 퍼진 행운 바이러스

김 씨의 가게가 최고의 명당이라면 인근 복권 판매점들도 준명당쯤 된다. 50여 m 떨어진 M판매점도 지난해 5월 15일과 올해 1월 15일 2차례 1등 당첨이 나왔다. 또 이곳과 인접한 J판매점과 G판매점에서도 각각 2차례와 1차례 1등 당첨자를 배출했다.

M판매점 단골인 이모 씨(44)는 “407억 대박집에서는 이미 거액 당첨자가 나왔기 때문에 대박이 나올 확률은 다른 집이 더 많지 않겠느냐. 두 점포가 가까이 있으니 양쪽의 좋은 기운을 다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이모 씨(51)는 “로또복권을 지갑에 넣어가지고 다니면 일주일 동안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에 엔도르핀이 돈다”면서 싱글벙글했다.

김 씨는 건강만 허락한다면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답답하지만 참을 만하다. 여름과 겨울에도 에어컨과 전기장판, 난로 덕에 별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 이만한 장삿거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도로 점용 허가 명목으로 춘천시에 연간 수십만 원만 내면 된다. 무엇보다 이 일이 재미있다. 기대에 찬 손님들에게 행운의 기회를 준다는 생각에 보람도 느낀다.

자부심도 대단하다. 춘천에서 관광지 빼고 ‘407억 당첨판매점’만큼 유명한 곳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김 씨는 취재를 마친 기자에게 로또복권 5000원어치를 건넸다. 억지로 복권 값을 떠안기고는 1만5000원어치를 더 샀다. 김 씨의 ‘대박 행운’이 나에게도 찾아 올까.

춘천=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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