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쩍은 물건 의심돼도 일당 채우려면…” ‘범죄’ 나르는 퀵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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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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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범죄 조직이 퀵서비스 배달을 범죄에 이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동아일보DB
일부 범죄 조직이 퀵서비스 배달을 범죄에 이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달 초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검거된 최모 씨(57). 전직 퀵서비스 기사인 최 씨는 경찰의 눈을 피해 위조 수표나 어음을 시내 곳곳에 배달하는 일을 했다. ‘진짜’ 퀵서비스 기사였던 그가 위조지폐 일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4년 이 조직의 물건을 배달하면서부터다. 성실하게 배달 임무를 수행하는 최 씨를 눈여겨본 ‘범죄 조직’은 당시 “큰돈을 벌 수 있다”며 최 씨를 유혹했다. 결국 이 조직의 유혹에 걸려든 최 씨는 다니던 퀵서비스 업체를 나와 조직의 ‘전담’ 배달요원이 됐다. 그가 배달 건당 받은 돈은 서울 지역은 5만 원, 경기도는 15만 원 정도였다.

퀵서비스 배달이 범죄의 주요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경찰은 위조어음이나 타인 명의로 개설한 휴대전화인 대포폰, 대포통장 관련 범죄의 약 90%가 일반 퀵서비스 업체를 통해 운반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퀵서비스 기사들은 지리를 잘 알고 있어 배달을 지시하기 쉽고, 조직원이 아니어서 적발되더라도 조직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퀵서비스로 대포폰을 배달할 경우 주문자는 자신의 신원을 노출하지 않고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물건을 주고받을 수 있다. 15년차 퀵서비스 기사인 A 씨(47)는 “위조어음, 대포통장 등으로 의심되는 물건을 여러 번 배달한 경험이 있다”며 “범죄에 이용되는 물건인 줄 알아도 하루 일당을 채우려면 어떤 물건이든 배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도 퀵서비스가 범죄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워낙 은밀하게 이뤄지는데다 퀵서비스 기사들이 “내용물은 모르고 배달만 했다”고 주장할 경우 마땅히 단속할 방법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물건을 여러 차례 배달하다 경찰에 붙잡힌 퀵서비스 기사 양모 씨(32)는 경찰 조사에서 “무슨 물건인지도 모른 채 딱 한 번밖에 나르지 않았다”며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양 씨가 사실상 공모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퀵서비스 대금을 현금으로 받은 데다 모의 사실을 부인할 경우 마땅히 증거를 찾을 방법이 없어 입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경찰은 아예 퀵서비스 기사들을 은밀히 포섭해 수사에 활용하는 실정이다. 지난달 말 서울경찰청 전화금융사기전담팀이 밝혀낸 보이스피싱 범죄는 이 조직이 주로 이용하는 퀵서비스 업체의 도움을 받아 통장 모집책, 전달책, 현금 인출책 등을 검거할 수 있었다. 당시 수사팀은 퀵서비스 기사가 배달을 위해 움직인 동선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조직원들의 거처를 파악했다.

업계에서는 퀵서비스가 범죄에 이용되지 않게 하려면 관련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는 누구나 전화기 한 대, 오토바이 한 대만 갖추고 세무서에 신고만 하면 영업할 수 있어 불법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것.

퀵서비스 노조 양용민 위원장은 “퀵서비스 시장은 규모가 연 3조 원에 기사가 17만 명이나 되지만 아직 관련 법규정이 없어 업체가 난립하고 있다”며 “퀵서비스 운송업이 화물 운수사업법에 포함돼 법의 통제를 받아야 운반하는 물건에 대한 관리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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