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헤겔’을 만나 희망을 찾았다

  • Array
  • 입력 2011년 4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 노숙인 등 3000여명 거쳐간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교실

6일 서울 성동구 용답동 서울메트로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희망의 인문학’ 강좌에 등록한 노숙인들이 철학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 노숙인들은 “실패를 딛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며 희망을 얘기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6일 서울 성동구 용답동 서울메트로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희망의 인문학’ 강좌에 등록한 노숙인들이 철학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 노숙인들은 “실패를 딛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며 희망을 얘기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어두운 색 점퍼를 입고 까맣게 얼굴이 그을린 50대 후반 남자 20여 명이 모인 강의실. 곳곳엔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이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수업은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와 헤겔, 공자의 사상에 대해 배우는 철학 수업. 6일 오후 서울 성동구 용답동 서울메트로 인재개발원 강의실에서는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수업이 열렸다.

이날 수업을 듣고 있던 노(老)학도들은 서울시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는 노숙인. 이들은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과정에 노숙인반으로 등록해 이날 개강식을 열고 첫 수업을 들었다. 문학과 철학과목을 2시간씩 듣는 과정이지만 지루한 기색도 없이 교수의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한 학생은 교수에게 “철학에도 학문의 경지라는 게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할 정도로 강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인문학으로 희망을 노래하다


강의실에 모여 앉은 27명의 노숙인은 저마다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었다. 이날 수업에 참여한 서갑희 씨(51)는 건설사를 운영하던 부친 덕분에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찾아온 회사의 부도와 부친의 사망으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서 씨는 부친이 차려준 레스토랑과 모텔을 운영하는 번듯한 사장님이었지만 1980년대 후반 부친의 사망 이후 사업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 결국 적자에 시달리다 운영하던 가게 문을 모두 닫았다. 사업에 실패한 뒤 부인과도 이혼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딸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결국 2년 전 서 씨는 조치원의 한 야산에 올라 평소 입에도 안 댔던 소주 두 병을 마신 뒤 스스로 손목을 긋고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다행히 새벽녘에 길을 지나던 등산객에게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서 씨는 “그날 이후 새 생명을 얻은 뒤 다시 출발해야겠다는 마음에 이렇게 생전 처음 철학 수업도 들어보겠다고 나왔다”고 말했다. 한 달에 수천만 원씩 벌며 돈 걱정 없이 살아온 서 씨였지만 이제 공공근로로 번 쌈짓돈을 한 달에 꼬박꼬박 50만 원씩 저축하며 아이들을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 서 씨는 “인문학 수업이 내가 나중에 사회로 다시 나갔을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며 “6개월 뒤 수료식 때엔 나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 노숙인-저소득층에 배움의 기회를


지난해 인문학 과정을 수료한 노숙인 출신 강모 씨(46)도 이젠 어엿한 직장을 가진 ‘사회인’이 됐다. 강 씨는 한 장애인시설에 취직해 주차관리를 맡아 하고 있다. 강 씨는 “지난 한 해가 나에겐 너무나 뜻 깊은 시간이었다”며 “인문학 수업을 들은 것이 한 가지 목표를 세워 노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강 씨는 지난해 서울시가 주관한 노숙인 저축대회에서 1000만 원을 저금해 저축왕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서울시는 2008년부터 희망의 인문학 과정을 개설해 3000명이 넘는 수강생에게 철학과 문학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올해도 1090명의 신입생을 받아 경희대 동국대 성공회대 이화여대와 함께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노숙인반과 저소득층반을 만들어 180여 명의 노숙인과 830여 명의 차상위계층 등 저소득자에게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올해 과정은 6개월간 이어진다.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