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에듀투어]왕은 전하, 왕비는 중전마마··· 임금님의 생활 배우며 역사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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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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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창덕궁

북악산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 왕조를 상징하는 위엄과 권위를 한껏 내세우고 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 왕조를 상징하는 위엄과 권위를 한껏 내세우고 있다.
우리역사 마지막 왕조인 조선왕조.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주권마저 일본에 빼앗긴 못난 왕조라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럼에도 조선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을 다수 낳은 문화대국이기도 했다. 서울에 위치한 경복궁과 창덕궁을 둘러보면서 조선 역사를 새롭게 익히고 왕과 왕실, 왕권과 민권에 대해 생각해보자. 조선 5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궁궐은 어느 한 곳 역사 현장이 아닌 곳이 없다.

“경복궁을 법궁(法宮)이라고 하던데, 법궁이 무슨 말이에요?”

“왕이 머무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말해. 정궁이라고도 하지. 그런데 이 법궁에 화재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비책으로 지어놓은 것이 이궁(離宮)이야.”

서울에 있는 궁궐은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다섯 곳이다. 법궁과 이궁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바뀌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경복궁이 법궁이었다. 하지만 전란 중에 궁궐이 모두 불타버리자 광해군은 창덕궁을 먼저 재건하고 이곳에 머물렀다. 이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법궁이 되었다. 대한제국 때는 덕수궁이 이어받았다. 온양온천이나 남한산성에 있는 행궁은 왕이 지방에 멀리 내려가 머물 때를 대비해 지어놓은 숙소다.

○ ‘전하’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광화문을 지나 근정문을 들어서니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이 북악산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왕의 즉위식, 문무백관 조회, 외국 사절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궐내에서 가장 장엄한 건물로 왕권을 상징한다. ‘부지런히 정치를 돌보는 집’이라는 뜻.

“전(殿)은 궁궐에서도 가장 높은 사람이 머무는 곳에 붙이는 이름이야. 임금이 자는 건물은 강녕전, 왕후가 자는 곳은 교태전이야. 신하가 임금을 부르는 ‘전하’라는 말은 말 그대로 ‘전 아래’에서 왕을 우러러본다는 뜻이지.”

근정전 마당에는 햇빛의 반사를 줄이기 위해 거칠게 다듬은 화강암이 깔려 있다. 마당 가운데 난 길은 주변보다 약간 위로 올라와 있다. 왕이 행차하는 전용길(御道·어도)이다. 어도 좌우에는 품계석이 있어 신하들이 직급별로 설 수 있게 했다.

근정전 바로 뒤에 있는 사정전(思政殿)은 왕의 집무실. 깊이 생각해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왕은 이곳에서 매일 아침 업무보고를 받았고 회의를 주관했다.

“임금의 하루는 어땠을까요?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이 가장 부지런한 왕이었을 테니까 그를 기준으로 살펴볼까? 왕은 매일 새벽 5시쯤 일어나 자정이 되어서야 취침했다고 해. 제일 먼저 왕실 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린 다음 정사를 돌보았지.”

왕은 매일 아침 조회에 참석하고 공문서를 결재하거나 상소문, 탄원서에 답을 내려주고 신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하루 네 번씩 열리는 경연에도 빼먹지 않고 참석했다. 왕의 이런 열정과 책임은 백성들에게 큰 축복이었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은 어땠을까요?”

“그 이야기는 좀 있다 경회루에서 해줄게.”

근정전 뒤에는 강녕전과 교태전이 앞뒤로 놓여 있다. 임금인 ‘용’이 사는 곳이라 다른 건물과는 달리 지붕에 용마루를 얹지 않았다고. 왕비를 ‘중전(中殿)마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왕비 침전을 ‘궁궐 가운데 있다’는 뜻의 중궁전(中宮殿)으로 부른 데서 유래한다. 경회루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물이다. 왕이 신하들과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 광화문에 해태상을 세운 이유는?

나쁜 기운으로부터 광화문을 지키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해태상.
나쁜 기운으로부터 광화문을 지키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해태상.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은 전국에서 아름다운 여성들을 선발한 뒤 궁궐로 데려왔어. 왕은 이들 ‘흥청’과 경회루 등에서 유흥을 즐겼는데 여기에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해.”

연산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도 경회루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중종은 연산군과 관계된 왕비 신씨를 폐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폐위된 신씨는 가끔 왕이 경회루에서 자신이 사는 인왕산 기슭을 바라본다는 소문에 궁궐에서 입었던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았다고 한다. 치마바위 전설이다.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으로 사용됐던 수정전,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다시 광화문으로 나왔다.

“훈아, 광화문 옆에 해태상을 왜 세웠는지 알지?”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다고 들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옛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풍수지리를 살폈어. 경복궁의 경우 저 멀리 관악산의 불기운을 받는다고 생각한 거지. 관악산 봉우리는 불꽃처럼 뾰쪽하잖아. 그래서 그 기운을 피하기 위해 해태를 세웠다는 거야. 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 물이 담긴 큰 독을 설치한 것도 풍수와 무관하지 않아.”

창덕궁은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이 피가 낭자한 경복궁을 피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나들이 때에 머무는 별궁으로 지었지만 임금들이 즐겨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했다. 경복궁이 왕조를 상징하는 위엄과 권위를 내세운다면 창덕궁은 기본 격식과 규모를 갖추면서도 자연과 조화되는 미학을 담고 있다.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해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동쪽에 있는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남쪽에는 왕가의 사당인 종묘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이 붙어 있다. 창덕궁과 종묘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조옥남 ‘특목고, 명문대 보낸 엄마들의 자녀교육’ 공동저자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조선의 궁궐

▷교과와 연계된 체험활동 목표
-궁궐 구조와 전각 이해하기
-조선시대 역사의 흐름 이해하기

▷자녀와 부모가 함께할 만한 추천활동
-조선시대 궁궐 모습 관찰하고 특징 찾기
-궁궐 창건과 재건 역사 알기
-궁궐에서 조상의 슬기 찾기

▷+α 탐구활동
-창덕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이유 알아보기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의 차이점 정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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