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남]‘아리랑’ 70년만에 국내무대 오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24일 03시 00분


29일 부산시민회관서… ‘춘향뎐’보다 11년 앞서
광복전 中서 20여회 공연… 장제스 총통도 관람

한국 최초의 오페라인 ‘아리랑’ 중국 시안 공연(1940년) 포스터. 당대 중국 최고의 판화가인 ‘범리’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사진 제공 한형석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
한국 최초의 오페라인 ‘아리랑’ 중국 시안 공연(1940년) 포스터. 당대 중국 최고의 판화가인 ‘범리’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사진 제공 한형석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
한국 최초 오페라 ‘아리랑’이 70년 만에 부산에서 공연된다. ‘한형석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는 “1939년 부산 출신 문화예술가인 ‘먼구름’ 한형석 선생(1910∼1996)이 작곡한 우리나라 최초 오페라 아리랑을 29일 오후 7시 반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다”고 23일 밝혔다. 아리랑은 현재까지 알려진 현재명 작곡 ‘춘향뎐’보다 11년 앞서 작곡된 것. 3막으로 구성돼 있다. 1940년 중국 시안(西安) ‘실험극장’에서 초연됐다. 당시 공연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광복군의 전신, 이하 한청) 나월환 대장과 중국 장제스(蔣介石) 총통도 눈시울을 적셨다.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렇다.

“때는 40년 전 늦은 봄. 평화로운 한국 ‘아리랑산’에서 목동과 시골처녀는 사랑을 나눈다. 이들은 곧 결혼해 부부가 되지만 일제 침략으로 금수강산은 피로 물들고 아리랑산에는 일장기가 꽂힌다. 5년 후 목동과 처녀는 조국 독립을 위해 부모와 생이별하고 중국 동북지역으로 향한다. 조국을 떠나면서 아리랑을 부른다. 이후 한국혁명군에 입대해 맹렬히 싸운다. 압록강 부근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한 지 오래. 시간이 흘러 35년 후 목동과 시골처녀는 노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광복을 위해 싸운다. 비록 이들은 적군포화 속에서 장렬히 전사하지만 마침내 태극기가 아리랑산 정상에 게양돼 펄럭인다.”

이후 아리랑은 광복 전까지 중국에서만 20여 회 공연됐다. 수익금은 한청 피복비로 사용했다. 당시 중국 언론과 음악계는 새로운 형식의 가극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광복 후 국내에서는 한 번도 무대에 올려지지 못했다. 1948년 부랴부랴 귀국한 한 선생 보따리에는 아리랑 악보가 들어 있지 않았다. 다행히 서곡, 간주곡 등 기악부 친필 악보는 챙겨 왔다. 이후 당시 기억을 더듬어 아리랑 제작노트를 중국어로 남겨 놓았다. 존재가 드러난 것은 2004년. 중국 근대음악사 석학 베이징(北京) 중앙음악학원 량마오춘(梁茂春) 교수가 중국근대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친 한 선생 자취를 찾아 부산대에서 특강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아리랑 작곡연도가 1939년으로 한국 최초 오페라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

국내 초연을 위한 작업은 쉽지 않았다. 예산 문제, 중국어로 쓰인 제작노트 번역 등이 특히 어려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진원 교수와 호서대 박은옥 교수 공동번역이 큰 힘이 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민경찬 교수팀이 음악자료를 문화재로 등록하고, 작곡가 백현주 씨가 편곡과 재구성을 하는 등 여러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원형에 가까운 작품이 완성됐다. 기념사업회 차재근 집행위원장은 “밤비니오페라제작소 연출가 김성경, 유럽 정상 소프라노 김성은, 부산이 낳은 바리톤 박대용 등 많은 출연진과 스태프의 참여가 없었다면 역사적인 공연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051-469-1978

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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