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음식점村, 반세기 만에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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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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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동마을 역사속으로

300년전 조선 숙종때 마을 생겨 이승만 권유로 유원지 변신
박정희땐 재벌에 넘어갈뻔…80년 대이후 불법 음식점 기승
계곡오염 주범으로 몰려 철거…55가구 연말까지 보상 이주

북한동 마을에서 평생을 보낸 이제업 씨와 봉종옥 씨(오른쪽부터)가 마을 내 사찰인 무량사 주지 무량 스님과 함께 철거를 앞둔 동네를 살펴보고 있다. 이들 뒤쪽 왼쪽에 보이는 것이 북한산성이고 오른쪽이 산성 안쪽에 지어진 북한동 마을의 집들이다.고양=김용석 기자 nex@donga.com
북한동 마을에서 평생을 보낸 이제업 씨와 봉종옥 씨(오른쪽부터)가 마을 내 사찰인 무량사 주지 무량 스님과 함께 철거를 앞둔 동네를 살펴보고 있다. 이들 뒤쪽 왼쪽에 보이는 것이 북한산성이고 오른쪽이 산성 안쪽에 지어진 북한동 마을의 집들이다.고양=김용석 기자 nex@donga.com
23일 오전 북한산 ‘북한동 마을’에 사는 봉종옥 씨(77)는 조용히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평생 살아온 마을을 떠나는 게 아쉬운 봉 씨는 할머니 때부터 쓰던 시커먼 뒤주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짐차에 실었다.

북한동 마을은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 2, 3km 올라간 깊숙한 산 속에 55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 행정구역상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인 이곳은 북한산성 안쪽에 자리 잡은 유일한 산골마을이다. 봉 씨를 비롯해 아직 남아 있는 20가구가 올해 말까지 이곳을 떠나면 북한산성 음식촌으로 유명했던 북한동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300여 년의 역사를 남기고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 북한산성 쌓으면서 마을 조성

북한동 마을의 시작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 37년(1711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창고와 건물을 지은 것이 마을의 유래다. 삼국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얘기도 있으나 큰 마을이 생긴 것은 산성을 축조한 뒤 행궁을 지키는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면서부터라고 한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동 마을은 서울의 최대 과일 공급원 중 하나였다. 살구가 많이 나 매년 봄이면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상인들이 앞 다퉈 찾아와 뭉칫돈을 내놓으며 입도선매(立稻先賣)했다. 하지만 다른 과일이 풍부해지고 살구 수요가 줄어들자 마을 살림이 가난해졌다.

평온했던 마을은 6·25전쟁으로 위기에 빠진다. 서울 수복 후 퇴각하던 북한 인민군 1개 연대가 북한산성으로 숨어들면서 연합군과 국군의 표적이 됐다. 어느 날 밤 조명탄이 터지더니 엄청난 양의 포탄이 떨어졌다. 얼마 뒤엔 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휘발유통을 잔뜩 떨어뜨린 뒤 숲을 불태웠다.

그러나 마을의 운명은 1950년대 말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오면서 바뀌었다.

“여기서 무엇을 해서들 먹고살기에 이리 빈궁한가.”(이 대통령)

“나무를 해다 땔감도 만들고 숯도 만들어 서대문에 내다팔고 있습니다.”(주민)

“나무를 함부로 베면 안 되지. 내가 여기까지 길을 닦아 줄 테니 유원지를 한번 만들어 보시오.”(이 대통령)

○ 유원지가 된 북한동 마을

북한산 상층부에서 내려다본 북한동 마을.
북한산 상층부에서 내려다본 북한동 마을.
길이 생긴 뒤 서울의 부자들이 지프를 타고 계곡을 찾아오면서 마을 모습은 변해갔다. “그땐 부자와 높은 양반들만 여기에 왔어. 장구를 든 기생들을 데려와 놀았지. 우리는 자리를 깔아 자릿세를 받고, 음식 시중을 들면서 먹고살았어.” 이제업 씨(81)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박정희 대통령 때엔 한 재벌그룹이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의 힘을 빌려 계곡을 통째로 차지하려 했다. 마을 입구에 매표소를 세우고 유원지를 운영하려 한 것. 그러나 10·26사태로 대통령이 시해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북한동 무량사 주지인 무량 스님은 “6·25 때 이 주변에 그렇게 많은 포탄이 떨어졌어도 마을 안의 피해는 하나도 없었어요. 재벌기업에 마을이 넘어갈 뻔했는데도 천운으로 피해갔다”고 말했다.

○ 오염의 주범 몰린 마을, 끝내 철거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경제가 발전하며 북한동 마을은 점점 골칫덩이가 됐다. 등산객이 늘어나자 음식을 팔려는 장사치가 몰려 원주민과 뒤섞였다. 불법으로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는 집이 많아졌다. 계곡물에 무단 방류하는 오폐수도 늘어났다. 사람들은 북한동 마을을 오염의 주범으로 손가락질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2001년부터 이 마을의 이주사업을 추진해 올해 말까지 7곳의 사찰과 암자만 남긴 채 마을을 모두 철거하기로 했다. 정부가 이 마을 55가구에 내준 보상금은 총 328억 원. 45가구는 계곡 입구에 조성된 이주단지에 건물을 지어 장사를 계속한다. 나머지 10가구는 올해 말까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다. 손동호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장은 “마을 터엔 나무를 심고 흙을 덮어 생태를 복원한다”며 “마을 역사를 기념해 일부 집은 남겨 홍보관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양=김용석 기자 nex@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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