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전증 박성규씨 ‘인간승리’
부천집~서울대병원 오가며 고통의 세월 꿋꿋이 버텨
그새 말단의사가 원로교수로 병원 30돌 행사때 선물 계획
서울대병원은 혈액투석을 하는 ‘인공신실’이 문을 연 지 30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23일 행사에서 아주 특별한 ‘깜짝 이벤트’를 한다. 인공신실이 생긴 그해부터 30년간 이곳을 이용해온 ‘최장기 단골환자’ 박성규 씨(61)와의 인연을 기념하고 그의 건강을 기원하는 선물을 줄 계획이다.
평범한 농사꾼이던 박 씨는 1979년 가을 만성신부전증 판정을 받았다. 평생 혈액투석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26세 부인, 두 살짜리와 갓난아이를 둔 31세 가장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이었다. 그해부터 서울대병원 인공신실을 이용하기 시작한 박 씨는 지금도 투석을 받으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 투석 비용 때문에 논밭 다 팔아
박 씨의 경기 부천시 자택에서 서울대병원 인공신실까지는 꼭 1시간이 걸린다. 투석은 오전 7시부터 낮 12시까지 5시간 동안 받는다. 지하철을 타고 오간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리가 불편해 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탄다.
18일 병원에서 만난 박 씨는 “처음 온 환자들은 마취제를 바르고 맞아야 할 정도로 주삿바늘이 굵지만 하도 오랫동안 맞아서 이제 아무렇지 않다”며 투석을 원활히 하기 위한 수술 때문에 엄지손가락 크기로 볼록 튀어나온 팔뚝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남편과 함께 병원에 온 부인 강윤옥 씨(56)는 “처음에는 과부가 되는 줄 알았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강 씨는 혈액투석이란 말 자체가 생소하던 30년 전 남편이 평생 격일로 기계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말에 “아찔했다”고 한다. 요즘엔 건강보험 등으로 투석 비용이 한 번에 1만5000원 정도지만 당시에는 10만 원이 들었다. 1주일에 세 차례 투석을 받아야 했으니 한 달에 100만 원 넘게 들었다. 집과 병원을 오가는 교통비 등까지 감안하면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던 강 씨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었다. 그 때문에 강 씨는 경작하던 논과 밭, 과수원을 모두 팔았다. 회사에도 나갔고 운전도 배웠다.
○ “그래도 살아야지” 희망으로 이겨내
투석을 하루만 늦춰도 몸무게가 2kg 가까이 불어 물도 맘대로 못 마시는 박 씨는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자”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투석을 하고 돌아오면 몸이 개운해진 탓인지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생기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새롭게 일었다. 집에서 멋모르고 아버지를 맞는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랬다. 그렇게 하루하루 끈기 있게 병원을 찾았다. 박 씨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거나 볼 수 있을까 했던 두 딸은 30대가 됐고, 손자까지 보게 됐다”며 “지금까지 산 건 가족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소풍도 가고 가족들끼리 송년 모임도 했던 다른 환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터줏대감’ 박 씨는 정정하다. 장녀인 혜진 씨(32)는 “어릴 때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걸 모를 정도로 건강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셨다”며 “우리가 신경 쓰지 않게 배려해주신 것이나, 이렇게 건강히 살아주신 것 모두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래 병원 신세를 지다 보니 서울대병원 교직원들을 훤히 꿰고 있다. 말단 의사가 이제는 원로 교수가 됐다고 한다. 서울대병원은 ‘인공신실 3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23일 박 씨에게 선물을 전달할 예정이다. 박 씨는 내원 15주년, 20주년 때도 병원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강 씨는 “15주년, 20주년 기념일에 간호사들이 돈을 모아 글자를 새긴 반지를 만들어 줬다”며 오른손 셋째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자랑스레 내보였다. 박 씨는 “비관하지 않고 ‘그래도 살아야지’ 했던 게 비결”이라며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 투석이 끝났다는 기계의 신호음이 ‘삑삑’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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