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생각 날 때마다 가족 떠올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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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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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인공신실 생길때부터… 매주 3차례 5시간씩 30년 꼬박 투석

■ 신부전증 박성규씨 ‘인간승리’
부천집~서울대병원 오가며 고통의 세월 꿋꿋이 버텨
그새 말단의사가 원로교수로 병원 30돌 행사때 선물 계획

18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7층 인공신실에서 박성규 씨가 ‘동정맥류수술’을 받아 볼록하게 튀어나온 왼쪽 팔에 주사를 꽂고 4시간째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 투석 환자들은 혈액이 더 잘 나오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혈액양이 많은 동맥과 정맥을 잇는 동정맥류수술을 받는다. 원대연 기자
18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7층 인공신실에서 박성규 씨가 ‘동정맥류수술’을 받아 볼록하게 튀어나온 왼쪽 팔에 주사를 꽂고 4시간째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 투석 환자들은 혈액이 더 잘 나오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혈액양이 많은 동맥과 정맥을 잇는 동정맥류수술을 받는다. 원대연 기자
서울대병원은 혈액투석을 하는 ‘인공신실’이 문을 연 지 30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23일 행사에서 아주 특별한 ‘깜짝 이벤트’를 한다. 인공신실이 생긴 그해부터 30년간 이곳을 이용해온 ‘최장기 단골환자’ 박성규 씨(61)와의 인연을 기념하고 그의 건강을 기원하는 선물을 줄 계획이다.

평범한 농사꾼이던 박 씨는 1979년 가을 만성신부전증 판정을 받았다. 평생 혈액투석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26세 부인, 두 살짜리와 갓난아이를 둔 31세 가장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이었다. 그해부터 서울대병원 인공신실을 이용하기 시작한 박 씨는 지금도 투석을 받으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 투석 비용 때문에 논밭 다 팔아

박 씨의 경기 부천시 자택에서 서울대병원 인공신실까지는 꼭 1시간이 걸린다. 투석은 오전 7시부터 낮 12시까지 5시간 동안 받는다. 지하철을 타고 오간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리가 불편해 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탄다.

18일 병원에서 만난 박 씨는 “처음 온 환자들은 마취제를 바르고 맞아야 할 정도로 주삿바늘이 굵지만 하도 오랫동안 맞아서 이제 아무렇지 않다”며 투석을 원활히 하기 위한 수술 때문에 엄지손가락 크기로 볼록 튀어나온 팔뚝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남편과 함께 병원에 온 부인 강윤옥 씨(56)는 “처음에는 과부가 되는 줄 알았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강 씨는 혈액투석이란 말 자체가 생소하던 30년 전 남편이 평생 격일로 기계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말에 “아찔했다”고 한다. 요즘엔 건강보험 등으로 투석 비용이 한 번에 1만5000원 정도지만 당시에는 10만 원이 들었다. 1주일에 세 차례 투석을 받아야 했으니 한 달에 100만 원 넘게 들었다. 집과 병원을 오가는 교통비 등까지 감안하면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던 강 씨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었다. 그 때문에 강 씨는 경작하던 논과 밭, 과수원을 모두 팔았다. 회사에도 나갔고 운전도 배웠다.

○ “그래도 살아야지” 희망으로 이겨내

투석을 하루만 늦춰도 몸무게가 2kg 가까이 불어 물도 맘대로 못 마시는 박 씨는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자”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투석을 하고 돌아오면 몸이 개운해진 탓인지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생기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새롭게 일었다. 집에서 멋모르고 아버지를 맞는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랬다. 그렇게 하루하루 끈기 있게 병원을 찾았다. 박 씨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거나 볼 수 있을까 했던 두 딸은 30대가 됐고, 손자까지 보게 됐다”며 “지금까지 산 건 가족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소풍도 가고 가족들끼리 송년 모임도 했던 다른 환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터줏대감’ 박 씨는 정정하다. 장녀인 혜진 씨(32)는 “어릴 때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걸 모를 정도로 건강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셨다”며 “우리가 신경 쓰지 않게 배려해주신 것이나, 이렇게 건강히 살아주신 것 모두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래 병원 신세를 지다 보니 서울대병원 교직원들을 훤히 꿰고 있다. 말단 의사가 이제는 원로 교수가 됐다고 한다. 서울대병원은 ‘인공신실 3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23일 박 씨에게 선물을 전달할 예정이다. 박 씨는 내원 15주년, 20주년 때도 병원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강 씨는 “15주년, 20주년 기념일에 간호사들이 돈을 모아 글자를 새긴 반지를 만들어 줬다”며 오른손 셋째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자랑스레 내보였다. 박 씨는 “비관하지 않고 ‘그래도 살아야지’ 했던 게 비결”이라며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 투석이 끝났다는 기계의 신호음이 ‘삑삑’ 울렸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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