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심야교습 금지 법제화’ 한달도 안돼 없던 일로

  • 입력 2009년 5월 19일 02시 55분


당정 ‘사교육비 경감’ 논의 18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교육 당정회의에서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오른쪽)과 이주호 교과부 제1차관(가운데)이 한나라당 의원들과 ‘오후 10시 이후 학원 교습 금지’ 등 사교육비 경감안을 논의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당정 ‘사교육비 경감’ 논의 18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교육 당정회의에서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오른쪽)과 이주호 교과부 제1차관(가운데)이 한나라당 의원들과 ‘오후 10시 이후 학원 교습 금지’ 등 사교육비 경감안을 논의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한다” “안한다” 오락가락… 따로 돈 黨政靑에 국민만 혼란

18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사교육비 경감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교육과학기술부와 한나라당의 당정 회의. 교과부는 입시 제도와 학교 운영 방안 개선안 등 여러 대책을 내놓았지만 이날 화두는 단연 지난달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곽승준 위원장이 언급한 ‘오후 10시 이후 학원교습 금지’ 법제화 방안이었다.

한나라당 소속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의원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굳이 입법을 통해 획일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현 정부가 중시하는 자율 원리에 맞지 않는다” “법에 명시하더라도 단속이 어려워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는 등의 문제 제기였다. 회의에서는 곽 위원장이 처음으로 이 사안을 제기한 뒤 한 달여 동안 빚어진 당정청 엇박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이 많았다.

한 의원은 “교육 문제의 책임 부서는 교육과학기술부”라면서 “책임 부서가 정책을 정리해 발표하기도 전에 책임 없는 위원회에서 먼저 들먹이며 정책 혼선을 초래한 것에 대해 논의의 한 주체인 본 의원도 불쾌하다”고 말했다. 결국 ‘오후 10시 이후 학원교습 금지’ 방안은 이런 논란 속에 없던 일로 하자고 결론이 났다. 안병만 교과부 장관은 회의에서 “교습시간을 몇 시로 제한하는 방안은 방법론 면에서 근본적인 것이 못 되고, 사교육을 줄이려면 강제적 수단보다는 공교육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해 주신 것으로 이해하겠다”며 당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한 의원은 당정 회의 직후 “의원들이 하나같이 강경한 목소리로 반대한 데는 이번 정책 추진이 곽 위원장-이주호 교과부 제1차관-정두언 의원의 사적 채널로 돌아가는 것처럼 비친 데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李대통령 ‘학원 심야교습 금지案 발표’ 언론보도 통해 알아

■ 당정청 혼선 전말

《지난달 2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원내대책회의. 홍준표 원내대표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곽승준 위원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자문기구의 장에 불과한 사람이 언론에 나와 집행기관을 무시하고 함부로 얘기해 국정운영에 혼선을 초래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자기 분수에 충실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오후 10시 이후 학원 교습금지 법제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곽 위원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한 재선 의원은 옆자리에 있던 정책위 소속 의원에게 “당하고 협의가 안 된 거였어”라고 물었다. 그는 “4·29 재·보궐선거가 끝나면 5월부터 회의를 시작하자고 했는데…. 참 모양이 우습게 돼버렸네”라고 대답했다. 재선 의원은 회의가 끝난 뒤 일부 기자들과 만나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당도 모르고, 정부도 모른다는데, 어떻게 곽 위원장 혼자 언론에 대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라며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미래위, 덜컥 “금지할것” → 黨 “자중하라” 반발
교과부도 “협의안된 내용”… 黨政 백지화 결론

지난달 24일 곽 위원장의 언론 인터뷰로 촉발된 사교육비 경감 논의가 당정청 정책 혼선이라는 상처만 남긴 채 마무리됐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사교육 수요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1000만 학부모와 학생이 우리 편’(곽 위원장 라디오 인터뷰)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학원시장에 무작정 메스를 들이댄다고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되물었다.

대통령도 언론 보도로 소식 접해

이번 ‘학원 심야교습 금지 무산 사태’는 내용과 형식에서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달 미래기획위원회는 인적자원 육성 계획인 ‘휴먼 뉴딜’의 하나로 사교육 대책 초안(草案)을 마련했다. 곽 위원장이 교육과학기술부 차관과 실·국장, 청와대 행정관 등과 30여 차례 실무 협의를 갖고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당초엔 이 초안을 청와대와 당이 검토한 뒤 여론을 수렴해 당에서 발표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곽 위원장이 덜컥 언론에 관련 내용을 확정안인 것처럼 내놓으면서 논의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곽 위원장의 언론 인터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보도를 보고서야 정책이 발표된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여당의 한 교과위원도 “곽 위원장이 무슨 자격으로 충격요법을 써가면서까지 정책을 발표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여권 전체에 정책 혼선이 빚어지자 이 대통령은 박재완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을 시켜 조율하도록 했다. 관계부처 차관들은 지난달 30일 서울시내 모처에서 모여 곽 위원장의 방안을 받아들이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나라당 ‘곽승준 발언’에 폭발

하지만 이번에는 한나라당이 문제였다.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6일로 예정됐던 당정 회의를 연기했다. 이 회의에는 곽 위원장도 참석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책위 관계자는 “미래기획위원회가 나서지 않을 자리에 나선다는 반응이 많았다”면서 “교과부가 중심이 돼 현실적인 안을 만들어 오도록 주문했다”고 말했다. 교과부는 수정안을 만들었다. 곽 위원장이 제기한 오후 10시 이후 학원교습 금지의 취지는 살리되 법제화 대신 학원 단속을 강화하는 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18일 당정 회의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것마저 거부했다. 여기에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소외된 데 대한 한나라당 측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

곽 위원장과 이주호 교과부 제1차관, 교과위원인 정두언 의원이 각각 기획-정책 지원-법안 입안 등으로 역할 분담을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책 추진 과정에서 ‘사적 채널’이 가동된 데 대한 불쾌감이 적지 않았다. 당 일각에서는 이를 이 대통령 친위세력의 독주로 여기면서 “여당은 거수기고 국회는 통법부냐”는 반발까지 나왔다.

교과부 “미래기획위 주도 못마땅”

교과부는 침묵 또는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곽 위원장의 발언이 나온 직후 교과부 당국자들은 “우리와 협의되지 않은 내용”이라며 공식적인 대응을 피했다. 이는 곽 위원장 측 설명과 배치된다.

교과부의 논리는 ‘사교육 대책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발적으로 발표될 경우 교육 현장의 혼란이 커진다’는 것이다.

안병만 장관은 내부 회의에서 불쾌한 기색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한 교과부 관계자는 “내부에는 곽 위원장의 발언 취지에 공감하는 의견도 있었다”면서 “주무 부처인 교과부가 사교육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데 미래기획위원회가 독식하는 것처럼 비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에 대해 여당의 한 의원은 “교과부는 의원들이 나서서 반대하니까 ‘웬 떡이냐’ 하는 표정도 있다”면서 “이번 해프닝으로 정부가 사교육 경감 의지가 없다고 국민이 오해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고기정 기자 oh@donga.com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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