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노조원 일 못하게 되면 가족특채

  • 입력 2009년 5월 7일 02시 57분


■ 공공기관 경영공시로 본 ‘노조 모럴해저드’

근무시간인 낮에도 대학-대학원 다니게 허용

노조전임자 근무평가때 상위점수 주게 명문화

《‘공사는 직원이 순직(殉職) 또는 공상(公傷)으로 퇴직한 경우 배우자 또는 직계자녀 1인을 특별 채용한다. 또 직원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되지 않는 사유’로 사망한 경우 배우자 또는 직계자녀 1인을 특별 채용할 수 있다.’(한국가스공사 단체협약) ‘비(非)조합원으로 부당 노동행위 또는 건전한 조합 활동에 불이익한 행위를 한 자에 대해 조합은 공사에 징계를 요청할 수 있다.’(한국전력 단체협약)》

‘신(神)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공기관들이 노동조합과 맺은 단체협약(단협)이 처음으로 일괄 공개됐다. 6일 기획재정부가 운영하는 공공기관 경영정보공시시스템인 알리오(www.alio.go.kr)에 따르면 가스공사, 한전 등 상당수 공공기관의 단협에는 노조가 기관장의 고유 권한인 인사(人事)와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부모의 뒤를 이어 자녀의 취업을 보장하는 ‘고용세습’을 명문화하는 등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부추기는 조항도 다수 발견됐다.

좀처럼 외부에 공개되지 않던 공공기관의 단협 내용이 이번에 한꺼번에 공개된 것은 재정부가 지난달 말부터 공공기관 경영공시 항목에 노동조합 관련 현황 및 복리후생비 등 6개 항목을 추가한 데 따른 것이다. 공개된 단협에 따르면 가스공사 외에 한국수력원자력의 노사는 업무상 재해로 조합원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됐을 때 배우자, 직계 자녀 1인을 특채하기로 했다. 노조가 강한 일부 대기업 등에서 암묵적으로 이뤄지던 고용세습의 근거 조항을 구체적으로 명문화한 것이다.

일부 공공기관은 특별휴가, 경조휴가를 과도하게 보장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 한국거래소, 산업연구원의 단협이 인정하는 경조휴가를 모두 합하면 30∼40일이나 된다.

민간 기업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교육 관련 특혜도 눈에 띈다. 예금보험공사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단협은 노조원이 방송통신대 수업에 참석할 때 특별휴가를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은 노조원들이 근무시간인 낮에도 대학, 대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한국토지공사 단협은 무주택 노조원들이 주택조합을 꾸릴 때 공사가 보유한 토지를 우선 공급하도록 하는 등 사측이 용지 확보에 적극 협조하게 돼 있다.

가스공사의 단협은 노조 전임자에게 쟁의 행위와 관련해 민·형사상 조치를 취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불법 파업이 일어나도 노조에 법적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한 것. 한전과 한국공항공사 등의 단협은 노조가 조합 활동에 반대하는 비(非)노조원에게 징계를 내리도록 경영진에게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철도시설공단과 한국도로공사 단협은 노조 전임자의 인사 고과를 매길 때 상위 수준의 점수를 주도록 규정했다.

또 한국전력, 인천국제공항공사 등은 노조 간부나 노조 전임자에 대한 인사를 할 때 노조와 사전에 합의하도록 했다. 재정부 당국자는 “역대 공공기관 기관장들이 노조에 조금씩 양보한 것들이 누적되다 보니 노조가 인사 같은 경영진의 고유 권한까지 침범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공기관 단협이 이처럼 노조에 유리하게 체결된 데에는 역대 기관장들의 무책임한 경영행태와 함께 높은 노조 조직률(총정원에서 노조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공공기관의 노조 조직률은 65.8%로 전체 산업 평균(10.8%)의 6배가 넘는다. 재정부는 “국민이 주인인 공공기관을 주인 없는 회사로 생각하는 노조가 적지 않다”며 “정부는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에 맞춰 단협 등에 반영된 도덕적 해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밝혀왔습니다▼

△본보 7일자 A10면 ‘공기업 노조원 일 못하게 되면 가족 특채’ 기사 중 ‘산업연구원의 단체협상이 인정하는 경조휴가를 모두 합하면 30∼40일이나 된다’는 내용에 대해 산업연구원 측은 “기획재정부에 제출한 노사 단협의 내용은 그렇게 돼 있지만 1999년 이후 이 조항에 따라 경조휴가를 실시한 적은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