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교과서 뒤집어읽기]불편의 미학

  • 입력 2009년 3월 2일 03시 00분


편리한 훈민정음 놔두고

‘…四十家中五十食人間豈有七十事’

<마흔(망할) 집에서 쉰밥을 먹네 세상에 어찌 일흔(이런) 일 있는가>

김삿갓은 왜 ‘한시 같은 우리말 시’를 썼을까

○ 생각의 시작

인간은 누구나 어렵고 까다로운 것보다는 쉽고 편한 것을 좋아한다.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되면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불편한 도구가 있을 때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쓰려 하기보다는 기존의 도구를 최대한 잘 이용해 편해지려고 한다. 언어라는 도구도 마찬가지다. 과거 우리에게는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남의 문자(한자)를 이용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그들(중국)의 방식에 맞추어 사용했다.

『훨훨 나는 꾀꼬리는 翩翩黃鳥

암수가 다정히 노니는데 雌雄相依

외롭구나 이 내 몸은 念我之獨

뉘와 함께 돌아가리. 誰其與歸

[고등학교 문학, ‘황조가’]』

○ 생각의 전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에는 여전히 불편함이 있었다. 원천적으로 기록을 못하는 한계에서는 벗어났지만 저들의 방식을 익혀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문자만 빌려오고 방식은 우리 것을 쓰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싹텄다. 역시 ‘불편함은 창조의 시작’이다.

향가 ‘안민가’는 ‘君隱父也(군은부야)’로 시작된다.

‘임금은 (백성을 사랑해야 하는) 아버지’라는 내용이다. 이것이 앞의 황조가와 다른 점은 우리말 사용 방식과 순서에 한자를 맞추었다는 것이다. ‘주어’가 맨 앞에 ‘서술어’가 맨 뒤에 오는 우리말의 순서를 따랐고, 우리말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조사’를 표기했다. ‘君’과 ‘父’는 의미(임금, 아버지)를 빌려다 쓰고, ‘隱’과 ‘也’는 소리를 빌려다 썼다. 남의 글자를 쓰되 내 방식으로 쓴 것이다.

○ 생각의 발전

그래도 여전히 불편은 있다. 내 방식으로 활용한다 해도 우선은 남의 문자를 익혀야만 한다. 그렇다면 쉽게 익힐 수 있는 내 문자를 만들자는 생각이 등장한다. 바로 훈민정음의 탄생이다.

○ 또 다른 생각

편하고 새로운 도구가 생겼다면 불편한 옛날 도구는 버리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불편함 속에 또 다른 활용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어쨌든 도구는 하나보다 여럿이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불편함을 가지고 새로운 창조를 해 보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천재 시인 김삿갓은 한시 속에 우리말을 동시에 담는 활용을 보여준다.

『二十樹下三十客 / 四十家中五十食 /

人間豈有七十事 / 不如歸嫁三十食』

분명히 형식은 한시(칠언절구)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이것을 읽을 수는 있어도 숨은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사연은 이러하다. 방랑의 길목, 주린 창자를 채우려 밥을 청하니 쉰밥을 내왔다. 사나운 인심이 고약하여 즉흥에서 뱉은 시다. 해석은 이렇다. ‘스무나무 아래의 서른(서러운) 객이 / 마흔(망할) 집에서 쉰밥을 먹네. / 세상에 어찌 일흔(이런) 일 있는가. / 집에 돌아가 서른(서러운) 밥 먹는 것만 못하리.’ 불편한 도구로 써보는 언어유희라. 멋지지 않은가? 역시 불편함이 창조의 시작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스스로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강창선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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