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SCHOOL DIARY]“꽃미남 주인공으로 대신해요”

  • 입력 2008년 11월 18일 03시 48분


고교 1년생 이모(서울 마포구 동교동) 양은 컴퓨터를 켜자마자 단골 만화책 판매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신간 만화 목록을 점검한다. 매일 오전 신간 만화책 목록이 공지된다. 요즘 한창 ‘꽂혀있는(매우 좋아한다는 뜻의 은어)’ 만화책 최신호가 나오기를 고대하는 이 양에겐 빼먹을 수 없는 일과다.

“앗싸, 나왔다!” 한 달 넘게 기다려왔던 최신호의 출간소식을 확인한 이 양의 얼굴이 밝아졌다. 인터넷 택배로 주문할까 잠시 갈등했다가 배달일까지 도저히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아서 하굣길에 만화책 판매점에 들러 직접 사기로 마음먹었다.

이 양이 좋아하는 만화책은 ‘BL(Boy's Love의 약자)’ 또는 ‘야오이(やおい)’라고 불리는 장르로 멋진 꽃미남의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여중고교생과 여대생 사이에서 인기인 BL은 일본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출간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 양이 골라준 BL 만화 한 권을 사서 읽어봤다. 조각 같은 외모의 고교생 A군이 전학을 간 학교에서 V라인 얼굴에 공부는 언제나 전교 1등, 수준급 운동실력에 자상함까지 갖춘 B군의 매력에 이끌려 사랑에 빠진다는 비현실적인 내용이다.

회가 거듭될수록 포옹이나 키스 같은 남자 주인공사이의 스킨십까지 등장하는 등 동성애 코드가 점점 부각된다.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순정만화도 많건만, 왜 굳이 이런 만화를 찾아가며 보는 걸까?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넘쳐나는 멋진 남자랑 예쁜 여자의 사랑 얘기는 사실 좀 진부해요. 남자 주인공을 항상 예쁜 여자 주인공에게 빼앗기는 기분도 들고요. BL 만화에선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주인공을 여자에게 뺏길 걱정은 없잖아요. 하하.”

만화라고 하지만 BL이나 야오이 장르는 애정표현의 묘사수위에 따라 ‘19세 미만 구독불가’로 분류된 책이 적지 않다. 만화책 판매점에서도 신분증 검사를 하기 때문에 대학생 언니의 주민등록증을 ‘슬쩍’ 하거나 사복을 입고 화장을 하고 와서 성인인 척 연기하는 학생도 있다. BL의 매력을 아는 대학생 언니라도 있으면 금상첨화. 언니와 함께 고르고 당당히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리즈당 단행본이 10∼15권을 훌쩍 넘기기 때문에 권당 3000∼4000원 수준인 만화책을 용돈만으로 구입하기는 부담이 크다. 같은 작가의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너는 1권, 나는 2권… 식으로 순서를 정해 구입해서 돌려보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이다. 교통카드 충전비로 부모님께 받은 돈의 일부를 ‘삥땅’쳐 만화책을 구입하거나, 인터넷 강의 등록비를 만화책 구입에 탕진하고 친구의 ID를 공유해 인터넷 강의를 볼 때도 있다.

만화라고는 하지만 성(性)에 대한 가치관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사춘기 때 동성애를 다룬 책을 보는 것에 대한 걱정과 삐딱한 시선을 이 양도 잘 알고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동성애요? 저 남자 좋아해요. 저보다 BL 만화를 좋아하던 언니는 대학 가더니 남자랑 소개팅 하느라 바쁘기만 하던데요 뭘. 매일 학교랑 학원을 맴도느라 남자친구 만들 시간도 없는데 만화로 하는 대리만족 정도는 좀 이해해 주시면 안될까요?”

새로 산 만화책을 들고 학원으로 향하는 이 양의 말이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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