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 34년만의 귀국 최중화 인터뷰

  • 입력 2008년 9월 8일 15시 53분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한 고(故) 최홍희 장군의 아들인 최중화(54)씨가 한국을 떠나 망명한 지 34년 만에 8일 귀국했다. ITF는 북한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한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WTF)와 민감한 관계에 있다. 최씨는 ITF와 WTF의 통합론이 거론되는 시점에 들어왔다.

최 씨는 1966년 서울에서 ITF를 창설한 부친이 1972년 박정희 정부와 불화 속에 정치적 망명을 하자 1974년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활동해 왔다. 그는 캐나다 시민권자이다.

최 씨는 2002년 부친 사망 이후 2003년부터 총재를 맡아왔다. 최씨는 인천국제공항 2층 라운지에서 열린 입국 기자회견에서 "내가 태어난 조국,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에 오게 됐다. 부친 생전에도 수 차례 오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부친께서 항상 갈망하시던 소원을 내가 성취해드린 것 같다"고 감회를 전했다.

그는 “이 자리를 마련해준 대한민국 정부에게 감사드린다. 언론선생님, 태권도 동지들 환영합니다. 우리나라 말이 서툰 점을 양해바랍니다”며 소감을 말했다.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 영상취재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 영상취재 : 정주희 동아닷컴 인턴기자

다음은 일문일답

=감회는

“여기 온 이유는 저희 부친께서 항상 갈망하시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왔다. 하늘에 계신 부친도 여기와 계실 것이고 3500만명의 ITF 수련생들도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부친의 정치적인 차이로 72년 망명의 길로 가셨지만 고의는 아니셨다. 태권도밖에 모르시는 분이다. 이북을 포함해서 세계 만방에 알리시고 보급화 하신 분이다. 본의 아니게 나쁜 결과가 나오게 되었고 나또한 아버지 인생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잘못을 했다면 그에 맞게 응당함을 받아야 하고 많은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국이기 때문에 당연히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자랑, 국가의 자산 태권도가 빛날 수 있도록 나머지 인생을 내가 태어난 모국에서 지내고 싶다.”

=한국을 어떻게 떠났고, 어떻게 생활했나.

“부친이 1972년 캐나다로 떠났고, 나는 1974년 이민을 갔다. 캐나다에서는 사범으로 계속 활동했다. 80년대 부친이 '이북도 우리 민족이고 태권도를 모르면 안된다'면서 태권도 시범단 16명을 구성해 이북을 방문했다. 나도 시범단의 한 명이었다.

이후 이북과 계약을 하고 사범교육을 했다. 1981년 1기, 1982년 2기생을 교육했다. 하지만 3기부터는 이북 자체에서 교육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우리 보고 손을 떼 달라는 얘기였다. 이후 본의 아니게 이북에서 약 2년간 더 생활한 뒤 1983년 동유럽으로 나와 태권도를 보급했다.

1997년 ITF 사무총장으로 임명됐고, 2001년 7월 총회에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임기의 총재로 당선됐다. 그 이후 재당선돼 계속 총재로 일하고 있다.”

=북측의 '손을 떼라'는 말은 어떤 의미였나.

“처음에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이 갖고 계신 기술을 몽땅 두고 가시오. 우리가 하겠소"라고 얘기하더라. ITF를 본인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육 후 '이런 사람을 파견해 달라'고 하면 엉뚱한 사람이 파견되기도 했다. 기술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대사보다 높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 어느 나라로 간다고 하더라. 태권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동유럽에서 태권도를 보급하다 보면 현지 외교부에서 불평도 많았다. '사범으로 온 사람은 찾을 수 없고, 태권도도 안 가르친다.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안다. 다 추방하겠다'고 했다. 가는 나라마다 그런 얘기를 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벌써 주도권은 이북이 갖고 있었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캐나다를 방문할 때 암살을 모의했었다는데.

“당시 광주사건(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캐나다에 상세히 보도됐다. 20대였던 나는 정치가 무엇인지 몰랐다. 옳고 그름을 떠나 국민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지시키고 싶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북으로부터 누구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본의 아니게 통역도 하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관여됐다는 얘기를 한다. 옛날 일이다. 이북에서 만들어 낸 사건에 내가 본의 아니게 관여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상하게 한다, 사살한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잘못을 시인한다. 정치적 순진함, 모험심, 이런 게 합쳐져서 그런 실수도 했다.”

=현행법상 간첩행위에 대한 혐의로 조사가 불가피할 텐데.

“해외에서 해당 기관과 여러 차례 얘기가 있었다. 다만 ITF와 나는 별개로 해야 한다. 내가 ITF 임원으로 한 일이면 대가를 받아야 한다. 의문 있으면 시원히 말씀드릴 준비가 됐다. 그래서 왔다.

=완전 귀국인가.

“내 마음은 항상 한국에 있었다. 조국에 마음대로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지내고 싶다. 개인적 소망이다.”

=세계태권도연맹(WTF)과 ITF가 통합 논의를 진행 중인데.

“WTF와 아직 정식적인 얘기는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 나라의 자산이고 자랑인 태권도가 서로 오해를 풀고 생존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이 많다고 생각한다. 세계연맹은 큰 일을 많이 성공시켰다.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부친도 열렬히 응원했다. 우리는 태권도가 올림픽에 계속 남을 수 있도록 언제나 지원하겠다.

다만 통합 의도는 좋은데 성격이 다른 스포츠와 무도가 합치는 것은 힘들다. 세계연맹은 스포츠로서 발전시켰고, 우리는 무도로서 태권도를 연구했다. 두 스타일로 충분히 발전시켜 서로가 도울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WTF가 장웅 측 계열과 회의를 한다고 들었는데 이는 이남과 이북 사람 간 태권도에 대한 문제지, ITF와 WTF간 문제는 아니다. ITF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임을 명확히 알아주길 바란다. ”

= 장웅 계열 ITF가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전위조직이라고 주장했는데, 앞으로 관계설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북은 ITF에 소속된 나라 중 하나다. 그래서 우리도 그 사람들과 일했다. 하지만 이북을 알리고 체제를 선전하는데 태권도를 이용하는 것에 찬성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전 세계가 이북 ITF는 아니다. 이북이 ITF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하지만 영향력은 있다. 세계태권도연맹을 이끄는 사람들이 잘 파악해서 이북과 태권도를 상의할지, 아니면 더 큰 ITF와 상의할 지 결정해야 한다.

장웅 측 ITF의 파견 사범들이 어떤 임무를 받고 나가는지를 알아야 한다. 진정한 사범인가, 아니면 태권도복을 입은 공작원인가. 우리는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다.”

= 북측에서 자금 지원도 있었다는데.

“그렇다. 한국에서는 벌써 ITF 회원국이라고 하면 사범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사범이 필요했다. 당시 사회주의 나라에는 사상이나 주의가 같은 사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북 사범을 보내기로 했고 도움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빈에 본부를 설치할때도 지원을 받았지만 이후 다 갚았다. 얻은 것 없이 태권도만 이용당했다. ”

=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평가를 한다면.

“남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삶이다. ”

=아버지에 최홍희 총재는 어떤 사람인가.

“아버지와 사이가 그리 가깝지는 않았지만 태권도를 하면서 많이 존경했다. 태권도를 가족보다도, 본인보다도 더 중요시하고 몰두한 분이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하고 싶었던 분이다.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shk919@donga.com

정주희 동아닷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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