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폰 부스 (Phone Booth)

  • 입력 2007년 5월 22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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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부스(Phone Booth)’야말로 진정 위대한 영화가 아닐까요? 공중전화 부스라는 한정된 공간. 여기서 80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다니요. 그런데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 해 보지 않았나요? 주인공 ‘스튜’가 꼼짝 없이 갇힌 공중전화 부스는 알고 보면 성(聖)스러운 어떤 장소를 절묘하게 빗대고 있다는 사실을….

[1]스토리라인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공중전화 부스. ‘스튜’(콜린 파렐)라는 남자가 들어섭니다. 연예인들을 각종 잡지와 TV에 소개해 주는 중개업자인 그는 유부남인 사실을 숨긴 채 ‘파멜라’(케이티 홈스)라는 여성에게 전화를 걸어 유혹합니다.

전화를 막 끊자, 공중전화 벨이 울립니다. 스튜가 수화기를 들자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키퍼 서덜랜드)의 목소리가 시작됩니다. 남자는 “당신을 지금 총으로 겨누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면서 “파멜라는 물론 아내 ‘켈리’에게도 전화를 걸어 당신의 죄상을 고백하라”고 협박합니다. 베일 속의 이 남자는 때마침 공중전화 앞에서 스튜와 시비가 붙은 한 남자를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졸지에 살인자로 몰리게 된 스튜. 출동한 경찰과 대치하던 그는 몰려든 군중과 TV 카메라를 향해 불현듯 죄상을 낱낱이 고백합니다. 외간 여자에게 흑심을 품은 사실은 물론이고, 평소 ‘짝퉁’ 명품시계를 차고 다니며 허세를 부리고 사람들을 이용해왔다는 사실까지….

한편 스튜의 행동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형사반장 ‘라미’(포리스트 휘터커)는 건너편 건물 어딘가에서 총을 겨누고 있을 의문의 남자를 추적합니다.

[2]핵심 콕콕 찌르기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공중전화 부스’는 어떤 공간일까요? 전화부스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요?

일단 공중전화 부스는 ‘거짓말의 공간’입니다. 스튜는 평소에도 휴대전화를 통해 거짓말을 밥 먹듯 하지만,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서서는 더욱 결정적인 거짓말(결혼 사실을 숨기고 다른 여성을 유혹하는)을 하니까 말이죠. 외부와 단절된 내밀한 공간인 공중전화 부스는 거짓말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검은 공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스튜가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서자마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슬쩍 빼는 모습이죠.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그는 왜 이런 불필요해 보이는 행동을 할까요?

반지를 빼는 스튜의 모습은 전화부스의 성격이 조만간 180도 바뀔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거짓말의 공간’으로부터 ‘고백(confession)의 공간’으로 말입니다. 자신의 죄상을 결국 남김없이 고백하게 되는 스튜. 비록 범인의 협박으로 시작된 고백이지만, 결국 스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 우러나는 속죄와 고백의 말들을 자기도 모르게 토해 냅니다.

자, 그렇다면 고백의 공간으로 용도 변경되는 공중전화 부스는 어떤 공간에 대한 은유일까요? 한번 알아맞혀 보세요.

결정적인 힌트를 드릴게요. 협박범이 스튜에게 던지는 말들을 유심히 살펴보세요. 범인은 스튜에게 돈을 요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원한관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솔직하게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기를 요구했을 뿐이죠. 협박범은 이런 어구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전화해서 아내에게 용서를 빌어. 죄를 고백하고 사면을 받아. 깨끗해지란 말이야.”

“모두 너의 기만과 허위와 술수의 대가야. 고백해. 회개해. 구원받고 싶다면….”

참 이상합니다. 일개 협박범이 쓰는 단어들치고는 지나치게 성스럽고 종교적이지 않습니까? 진실, 용서, 고백, 사면, 회개, 그리고 구원이라니…. 여기서 우리는 영화 속 공중전화 부스가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그런 성스러운 공간에 빗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게 됩니다. 전화 부스 뒤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커다란 광고 문구는 공중전화 부스의 이런 성격을 암시해주는 결정적인 실마리입니다.

‘Who do you think you are(당신은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정 되돌아보는 공간. 그렇습니다. 공중전화 부스는 성당에 자리 잡은 ‘고해소(告解所)’에 대한 절묘한 은유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털어놓으며 고해성사(告解聖事· 죄를 뉘우치고 신부를 통하여 하느님에게 고백하여 용서받는 일) 하는, 바로 그 고해소 말입니다.

[3]종횡무진 생각하기

참으로 아이러니(irony·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의 장소였던 공중전화 부스가 성스러운 고백의 장소로 변하다니요. 영화 속에는 이런 재미난 아이러니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우선 협박범을 볼까요? 범인은 목숨을 담보로 스튜를 협박하는 범죄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범인은 고해소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신부(神父)’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스스로 고백하고 구원을 받도록 도와주는 신부 말입니다(영화 속에서 범인이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고해소에 들어간 신부가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더 흥미로운 아이러니도 있습니다. 주인공 스튜의 처지이지요. 스튜는 이런저런 입발림 으로 매스컴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일종의 사기꾼입니다. 하지만 스튜의 처지는 180도 역전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매스컴을 가지고 놀았던 스튜. 하지만 결국 그는 전화 부스에 갇힌 자신을 보도하려고 몰려든 수많은 매스컴의 호재(好材)로 전락해 버리니까요.

여러분,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던 스튜의 과오는 이런 엄청난 일을 당할 만큼의 ‘죽을죄’가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어느 날 스튜처럼 전화 부스에 갇힐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속죄는 진정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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