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석궁 습격’ 3, 4차례 현장답사… 치밀한 범행계획

  • 입력 2007년 1월 17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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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장윤기 법원행정처장 주재로 주요 간부들이 참석한 비상대책회의가 열려 전날 발생한 고법 부장판사 석궁 피습사건의 대책을 논의했다. 김재명 기자
1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장윤기 법원행정처장 주재로 주요 간부들이 참석한 비상대책회의가 열려 전날 발생한 고법 부장판사 석궁 피습사건의 대책을 논의했다. 김재명 기자
전 성균관대 교수인 김명호(50) 씨는 서울고법 민사2부 박홍우(55) 부장판사를 석궁으로 습격하기 전에 수차례 현장을 답사하고 석궁 외에 회칼을 준비하는 등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16일 밝혀졌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이 같은 정황이 확인됨에 따라 이날 김 씨에게 살인미수와 총포 도검 화약류 단속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공범이 있을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김 씨 예금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영장도 신청해 자금추적에 나서기로 했다.

▽사전 답사, 회칼과 노끈 준비=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관보에 실린 공직자 재산공개 내용을 통해 박 부장판사의 주소를 알아냈으며, 재판 과정에서 얼굴을 확인하고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승용차 번호와 퇴근시간을 파악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범행을 저지르기 1개월 전부터 3, 4차례 박 부장판사의 아파트를 찾아가 거주하는 층과 호수도 확인했다는 것.

범행 당일인 15일 박 부장판사의 집에 갈 때는 대만제 석궁과 화살 9개 외에도 35cm짜리 회칼, 6.6m짜리 비닐 노끈을 준비했다.

김 씨는 석궁에 대해 “동작경찰서에 레저용으로 등록했으며 구입할 때 받은 화살 20개 중 집에서 연습용으로 쓴 11개를 제외한 9개를 모두 들고 나왔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김 씨가 석궁에 화살 1발을 장전하고 2발을 왼쪽 허리춤에 꽂은 채 2층 계단에 숨어 있다가 퇴근한 박 부장판사가 나타나자 “박홍우 판사, 그게 판결이야”라고 소리치면서 달려들었으며, 현장에서 아파트 경비원에게 붙잡힌 뒤에도 “죽여 버리겠다”며 추가로 화살을 장전하려다 운전사의 제지로 무산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김 씨가 회칼 등 또 다른 흉기를 갖고 있었던 점, 화살이 꽂힌 각도가 위에서 아래쪽으로 향해 있어 계단 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조준사격을 한 것 같다는 점으로 미뤄 박 부장판사를 살해할 목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김 씨는 “석궁으로 위협해 편파적 판결을 내린 이유를 자백받으려 했으며, 실랑이를 벌이다 우발적으로 발사된 것”이라며 살해 의도를 부인했다.

한편 석궁의 위력은 발사 직후에 가장 파괴력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김인섭 대한석궁연합회 이사는 “범행에 사용된 석궁은 날개가 짧고 위력이 약한 대만제인 데다, 빗맞는 바람에 피해가 비교적 가벼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사 경호 조치 긴급 지시=대법원은 16일 장윤기 법원행정처장 주재로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법정에서 공격적인 언동과 소란 행위가 예상되는 사건에서 엄격한 감치 재판 등을 통해 법정 내 질서 유지, 법정 및 청사 방호 상황 재점검과 필요한 경호 조치를 강구하라”고 일선 법원에 긴급 지시했다.

또한 “법원 앞 1인 시위자나 악성 민원인 등 법원 주변의 수상한 사람에 대한 동향 파악과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당부했다.

이날 회의 참석자들은 “이번 사건은 단순히 판결 결과에 대한 개인의 불만 표시가 아니라 극히 비상식적이고 극악한 범죄행위”라며 “사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법치주의에 대한 테러 행위”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19일 전국 법원장 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오늘 회의에서는 사법부 스스로를 돌아볼 측면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자성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며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는 이런 문제까지 포함해 근본적인 검토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이날 오후 5시 반경 서울대 병원을 찾아 15분가량 박 부장판사를 위로했다. 담당 의사인 외과 박규주 교수는 “화살이 근육층까지 들어가 세균 감염 우려가 있고, 염증이 진행 중이어서 항생제를 투여하고 있다”면서 “상처가 심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 충격이 커서 당분간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전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도대체 어떤 수학문제였기에…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가 법원 판결에 불만을 품고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습격한 사건의 발단은 12년 전 김 씨가 재직했던 서울 성균관대 1995학년도 입시의 대학별 고사 수학Ⅱ 7번 문제였다.

당시 채점위원이던 김 씨는 공간 벡터의 증명을 요구하는 이 문제에 대해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오류를 지적했다. 이 때문에 학교 측과 갈등을 빚은 것이 1996년 재임용 탈락으로 이어져 보복을 당했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그러나 학교 측은 “교수로서의 자질이나 학생지도 실적에 문제가 있어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이라며 “수학 문제 오류 시비와는 무관한데도 김 씨가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법원도 “김 씨가 수강 학생들이나 동료 교수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거나, 학생들에게 적합한 교수 능력을 갖췄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인정된다”고 판결했고, 수학 문제 시비에 대해선 아예 판단을 하지 않았다.

다만 국내외 수학자들은 시험 문제 오류 논란에서는 김 씨를 지지했다.

1996년 전국 44개 대학 수학과 교수 189명은 “대학에서 제시한 ‘모범답안’은 문제가 잘못됐음을 호도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냈고, 1997년 9월 세계적 권위의 과학저널 사이언스는 ‘올바른 답의 비싼 대가’라는 기사로 김 씨의 재임용 탈락 사건을 다뤘다.

10년여 만인 16일 대학수학회는 “곧 이사회를 소집해 이 문제를 논의한 뒤 공식 견해를 정하겠다”고 밝혔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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