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는 여유 생겨서 하는게 아니라 시간을 쪼개서 하는 것"

  • 입력 2006년 12월 27일 15시 54분


코멘트
26일 오후 2시경 서울 중랑구 망우3동 한 가정집. 초등학교 1~3학년생 12명이 탁자에 삥 둘러앉아 한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인 엄지연(8) 양의 어머니 정명옥(44·여) 씨가 화이트보드에 '兄弟(형제)'라고 쓰고 뜻을 풀이하자 아이들은 '형제'라고 큰 소리로 읽으며 연습장에 한자를 하나씩 써갔다.

이 공부방에 다니는 학생은 모두 21명. 윤명화(46·여) 씨 등 맞벌이 주부 9명이 교사다. 이들은 서로 시간을 쪼개 아이들을 돌본다. 여느 품앗이 공부방처럼 다름없이 보이지만 학생 13명은 돌봐줄 이들이 마땅치 않은 저소득층 자녀나 소년소녀 가장이다.

맞벌이 주부들이 자신의 아이만 키우기도 버거운 터에 남의 아이까지 돌보는 '사랑의 어울림터'인 공부방이 동네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윤 씨는 2004년 3월 이웃 주부 3명과 함께 서로 시간을 쪼개 아이를 대신 맡아주는 공부방을 꾸렸다. 이들은 동네 놀이터를 꽉 채울 정도로 방치된 아이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중랑구는 결손 가정의 비율이 40%다. 이들은 이웃아이들도 같이 키우기로 결심했다.

초등학생 김지성(8·가명) 미정(7·여·가명) 남매는 학교를 마치면 대형 할인매장의 시식 코너에서 배를 채운 뒤 놀이터를 돌아다녔다. 부모는 생계를 잇느라 바빠서 이들 남매를 돌봐줄 틈이 없었다.

윤 씨는 올해 초 동네 시장에서 철 지난 옷을 입은 이들 남매를 봤다. 그는 부모를 설득해 이들 남매를 공부방에 데리고 갔다. 이후 지성 미정이의 표정은 또래 아이들처럼 밝아졌다.

공부방 주부들이 함께 키우는 아이도 있다. 정지훈(13·가명) 지성(8·가명) 형제는 이혼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왔으나 올 10월 어머니가 암으로 숨졌다. 2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아버지는 이들 형제를 키울 형편이 못된다. 주부들은 이들 형제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반찬을 대주고 있다.

이들도 생활형편이 넉넉지 않고 직장을 다니거나 부업을 하고 있어 항상 시간에 쫓겼고 계속 호주머니를 털어 간식을 마련하기도 부담스러웠다.

올 4월 돌파구가 마련됐다. 윤 씨가 우연히 '우리 아이 희망 네트워크' 중랑센터 개소식에 갔다가 지원의 손길을 얻었다. '우리 아이 희망 네트워크'는 민간 차원에서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 아이들을 지원하는 안정망을 구축하는 운동이다. 한국자원봉사협의회가 주관하고 삼성사회봉사단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동아일보사가 후원하고 있다.

중랑센터는 공부방에 필요한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로 하고 윤 씨 등 주부들은 힘을 내 아이들을 돕기로 했다. 정 씨는 "공부방에서 한계를 느꼈을 때 중랑센터를 통해 우리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공부방은 중랑구의 영문 이름 첫 자와 서로 돕자는 뜻을 담은 'J-품앗이'로 이름을 바꿨고 세부 운영 지침도 새로 만들었다. 또 학교가 쉬는 토요일엔 중랑센터를 통해 뮤지컬과 영화, 생태교실 등 프로그램도 제공 받았다. 'J-품앗이'기 출범하자 관심을 갖고 봉사하는 주부도 늘었다.

주부 조성희(34·여) 씨는 "봉사는 여유가 생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쪼개서 하는 것임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중랑센터 사회복지사 허미화(30·여) 씨는 "이웃의 보살핌 속에서 성격이 밝게 변해가는 아이들을 보면 주부들의 노력이 사회의 한 구석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유종기자 pe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