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교과서 깊이보기]<1>영어 시간에 철학하기

  • 입력 2006년 10월 9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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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40대 대통령 레이건(D.Reagan)이 선거에 나섰을 때 일이다. 기자 중에는 그를 ‘리건’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꽤 많았단다. 철자와 발음이 따로 노는 영어의 특징 탓이다. 영어에서는 낱말을 놓고도 적잖은 오해가 벌어지곤 한다. 예컨대 ‘carrier’는 손수레, 우편배달부, 심지어 항공모함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점은 어느 나라 말에나 있다. 글자만 보고 사람 이름 부르기 어렵기는 일본어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어로 숫자를 말하려면 머릿속으로 한참 계산해야 한다. 프랑스어에는 71을 ‘60+11’이라고 한다. 70을 뜻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어는 또 어떤가? 입말과 적는 말이 달라 글을 익히기 어렵다. 그래서 문맹(文盲)이 많단다.

언어의 단점은 다른 나라 말로 옮길 때 더 심하게 드러난다. ‘Deeply sorry’는 ‘매우 유감이다’로도, ‘깊이 사과드린다’로도 옮길 수 있다. 번역에 따라 주는 느낌이 아주 달라지니 오해와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빈틈없고 명확한 ‘만국 공통 언어’를 만들 수는 없을까? 언어학자와 철학자들은 완벽한 언어를 오랫동안 꿈꾸어 왔다. ‘에스페란토(Esperanto)’는 이런 바람의 결과다. 그러나 세계 공용어의 자리는 보통 가장 힘센 나라의 언어가 차지하곤 한다.

우리 시대 국제어는 영어다. 언어는 세계화될수록 단순하고 명확해진다. 이태원의 상인들은 낱말 수십 개와 간단한 어법 몇 개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도 흥정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예수의 말은 당시 상인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던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어린 아이들도 알아들을 만큼 간단한 단어만 갖고도 성자(聖者)의 깊은 뜻을 살려내었다. 할리우드 영화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대사는 짧고 쉬운 영어로 짜여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세계 공용어는 문화를 단순하고 멋없게 만들기도 한다.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이 눈(雪)을 표현하는 말은 수 십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영어로 옮기면 그 숱한 말이 그냥 ‘snow’일 뿐이다. 영어를 자기 말로 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문학에서는 화려한 꾸밈말이 인기를 끌었다.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서로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주던 ‘살롱(salon) 문화’에서는, 말에 담긴 미묘한 느낌과 감정이 귀부인들에게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간단하고 분명한 표현이 미덕인 시대다. 정보와 속도가 돈인 현실에서 장식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가 빠르게 변함에 따라 새로운 낱말이 숱하게 쏟아져 나오지만, 문장은 되레 짧아지고 표현 역시 간단해진다. “즐겁게 감상하세요”도 길다고 “즐감!”이라 하지 않는가! 섬세한 감성을 짧고 얕은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국제 언어’로 더 간단해진 영어로 옮겨진다면, 내 가슴의 뜨거움은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말과 생각은 주고받으며 서로를 만든다. 단순한 표현은 결국 생각도 감정도 간단하게 만들 터다. 다양한 모든 것이 하나의 표준 아래 모이는 세계화 시대다. 영어 공용화는 이미 피할 수 없는 대세다. 온 세계의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어 가는 모습은 과연 축복일까, 재앙일까?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영어가 우리말같이 쓰인다면 이익일까요,손해일까요?

영어 공용화는 우리에게 이익일까요, 손해일까요? 추상적인 문제일수록, 생활 속의 모습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논의를 풀어 보세요. 영어 공부할 때 어려움, 그리고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친구,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 등을 떠올리면서 영어가 우리말같이 쓰이게 될 세상을 그려 봅시다. 어떻게 생각을 펼쳐야 할지 좀 더 분명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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