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고3 아들, 중3 딸

  • 입력 2003년 10월 28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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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1000만원 정도는 융자받아 줄 수 있지?”

올해 초 아내가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물었다.

“왜?”

“응. 애들이 이제 고3, 중3이 되니까 아무래도 과외비가 많이 들어가게 돼서….”

“내 수입의 70∼80%를 애들 교육비로 쏟아 넣으면서 그래도 부족해? 고액 과외 시킨다고 애들 성적이 그에 비례해 오르지도 않을 텐데…. 욕심 좀 부리지 마.”

“남들은 집 팔아 조기유학도 보내는데, 그 정도도 못해 줘….”

서울 강북의 36평 아파트에 사는 어느 부부의 ‘입시장정(入試長征)’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료에게 아내와의 갈등을 얘기했다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질타를 받은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요구를 들어 주었지만 그 후로도 몇 차례 아내의 ‘독촉’에 시달렸다. 부부는 지난 10개월여 동안 수없이 충돌하고 일시 화해하며 고3 아들과 중3 딸을 상전(上典)으로 떠받들어 모셨다.

고3 아들은 영화감독 지망생이다. 다른 과목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수학 때문에 고생이다. 수학을 못해 2전3기 끝에 가까스로 대학에 진학한 아빠는 그래서 아들에게 늘 죄책감을 느낀다. 올해 들어 비로소 강남에서 부족한 과목에 대한 과외를 받기 시작했으니 이 또한 부모의 책임일 것이다. 자수성가한 아빠는 아들이 ‘문제작’보다는 ‘흥행작’을 만들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기를 바란다.

중3 딸은 외국어고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전 1, 2시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오는 악바리다. 수학과 과학을 잘하지만 책 읽기를 싫어한다. 학교에서 학생 본인과 학부모의 장래 희망을 적어 오라는 가정통신문이 왔을 때 딸은 ‘앵커우먼’과 ‘교수’를 써냈지만 아빠는 ‘현모양처(賢母良妻)’라고 적었다. 아빠는 딸이 재원(才媛)으로 불리기보다는 반듯하다는 얘기를 듣기를 더 원한다.

아내는 요즘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교회 새벽기도에 간다. 그의 기도 중에 자신을 위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가족 모두가 안다. 오전 6시 반에 아들을 깨워 아침을 먹인 뒤 학교에 데려다 주고, 7시 반부터는 딸과의 ‘등교전쟁’에 들어간다. 20분은 깨워야 자리에서 일어나고, 자신을 하녀 부리듯 하는 딸에게 엄마는 화 한번 내지 않는다. 아내가 딸을 데려다 주기 위해 집을 나서면 남편은 혼자 밥을 챙겨 먹고 출근한다. 저녁에는 또 ‘학원배달’이 이어진다.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엄마는 제대로 자리에 눕지 못한다. 밤늦게 느닷없이 아이들이 참고서가 필요하다고 하면 귀신에라도 홀린 듯 벌떡 일어나 거리로 달려나간다.

남편이 올 한 해 가족을 위해 한 일이란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한 것과 매일 아침 산에 올라 아들과 딸, 아내를 위해 잠깐씩 기도한 것이 전부다. 그가 올해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한 돈은 몇십 만원에 불과하다. 이제껏 복권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가 올해 들어 남몰래 로또복권을 사고, 주말마다 행여 누가 볼세라 숨어서 당첨번호를 맞춰 보곤 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내년에는 부디 아내와 한 이불 속에서 잠들 수 있기를 그는 요즘 간절히 소망한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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