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박세일/˝교수님,반성문 씁시다˝

  • 입력 2002년 5월 21일 18시 34분


사회가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흔히 이렇게 된 원인을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정치를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국정이 표류하고 사회 기강이 문란하고 세상이 혼란스러운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학자들이 이 시대의 선비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자들 사이에 ‘선비정신’이 후퇴하고 대학문화가 시장화 패거리화되고 있으며 학문에 허학(虛學)이 승하고 실학(實學)이 약하기 때문이다.

선비란 본래 나라의 원기라 했는데 이 원기가 쇠퇴하고 있는데 어떻게 훌륭한 정치가들이 나오겠는가.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학자들은 두 가지 큰 죄를 짓고 있다.

▼총장 인기투표로 뽑아서야▼

첫째, 학자는 사회의 근본가치와 윤리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공을 사보다 앞세우고 의를 이보다 중히 여기는 실천을 통해 사회 기강과 풍속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고 정신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한 마을에 훌륭한 선비가 나오면 동네 아이들의 말씨가 달라진다고 했다.

그런데 요즈음 대학을 보자. 본래 총장이나 학장은 ‘학문과 인품이 출중하고 학교 경영능력과 비전이 있는 분’을 교내외에서 폭넓게 찾아 지극한 정성으로 모셔오는 것이 바른 길이다. 한 마디로 ‘총학장 추대제’가 정도다.

그런데 요즈음은 교수들 간의 인기투표로 총학장을 뽑으니 시장적 정치문화가 판치고 대학의 존엄과 선비정신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총장이란 사림(士林)의 어른인데 경조사 잘 다니고 동료들에게 술 잘 사고 학연이다 지연이다 하면서 학내 패거리 정치에만 능한 사람으로 총장을 뽑아서야 되겠는가.

미국의 하버드대학은 총장의 평균임기가 22년이고 대부분의 유명 대학도 10년이 넘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서울대는 총장의 평균 임기가 2년 반도 안 된다. 무슨 일이 제대로 되겠는가.

또한 최근 어느 대학에선 총장이 2명 나와 싸우고 있고, 어느 대학에선 교수들이 대의가 아니라 사익을 위해 총장실에서 농성을 했다고 한다.

둘째, 학자는 공동체의 비전과 이상, 그리고 발전 전략을 제시해야 하는데 우리 학자들은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학자들은 정치인들에게 국가 발전의 비전도 없고 전략도 없다고 비판하지만 내가 보기에 국가 발전의 비전과 전략을 연구하고 제시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학자들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비란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들을 구할 방도를 제시해야 한다고 하지 아니했던가.

그런데 우리 대학의 학문은 어떠한가. 이 시대가 당면한 국가과제를 푸는 데 얼마나 ‘구체적’으로 기여하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과 이상을 제시하고 국가 발전 전략을 올바로 연구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그 주된 이유는 첫째 대학에 기초학문이 부실하고, 둘째 학문이 실사구시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대학에서는 문학 역사 철학 수학 과학 등의 기초학문을 충분히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원래 기초학문은 학부 수준에서 철저히 가르치고 법학 경영학 의학 공학 등은 전문대학원에서 특화해야 한다. 그런데 학부 교육을 고집하는 소위 인기학과들의 대학 이기주의 때문에 기초학문의 부실은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다.

▼사회 비전-전략 제시 못해▼

또한 우리나라 학문에는 공론(空論)이 많고 실사구시가 적다. 현장을 중시하는 실무적 전문성이 취약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에는 외국과 달리 소위 ‘국가정책대학원’이 없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데도 노하우가 필요한데 우리나라에는 국가를 경영하는 지식과 노하우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전문대학원이 없다. 기업을 연구하는 경영대학원은 수없이 늘어나는데 막상 더욱 중요한 국가정책을 연구하고 국가경영 인재를 길러내는 대학원은 하나도 없다. 그 결과 정책 실패는 반복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사림은 기초학문도 제대로 못하고 국정운영의 실무에도 밝지 못하니 이 시대를 구할 비전과 전략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시대를 살면서 사회 기강과 풍속도 바로잡지 못하고 공동체의 비전과 전략도 제시하지 못하니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 나라 학자들이 아니겠는가.

박세일 서울대 교수·법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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