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6돌 포럼]"구조조정 지속…경제체질부터 바꿔야"

  • 입력 2001년 8월 9일 18시 23분


□한국경제의 현주소는

▽이현재 전 국무총리〓과거 한국경제는 값싼 노동력과 토지 등 생산요소를 최대한 투입해 양적으로 성장하는 발전모델을 추구해왔다. 빈곤 극복을 위한 고속성장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경제 체질을 바꾸고 강화하려는 노력을 제때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세계 경제환경은 놀랄 만큼 변해버렸다. 과거 우리가 가진 경쟁력이 세계 경제무대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새로운 경제, 새로운 경영이 필요하다.

▽박용성 회장〓반도체 조선 등 일부 산업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전반적인 경쟁력이 떨어진다. 평가항목별로는 정부규제 노사관계 기업환경 등이 특히 문제다. 정부는 수천건의 규제를 풀었다고 하지만 기업인들이 피부로 느끼기는 어렵다. 현행 휴가제도를 유지하면서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면 세계에서 가장 근무일수가 적다는 프랑스보다 휴일수가 많아진다. 기업도 경영투명성 등에 있어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글 싣는 순서▼
- 1. '국론분열-갈등' 치유의 길
- 2. 정치부터 바뀌어야 한다
- 3. 경제 어떻게 살릴 것인가
- 4. 교육에서 희망을 찾아라
- 5. 남북 문제 바른 해법은
- 6. 4강과의 외교관계 재정립을
- 7. 외국 전문가들의 충고

▽유장희 원장〓한국의 국가경쟁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다. 세계 경제의 변화에 대한 적응능력이 부족하고 정부 등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 초기에는 모든 경제 주체가 일치단결해서 ‘한번 해보자’는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성장이 한계에 이르면서 노사문제 등 사회적 갈등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경제정책 등을 획기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이 경쟁력을 갉아먹나

▽이 전 총리〓구조조정은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구조조정은 한번 시기를 놓치면 뒤늦게 아무리 잘 해봐야 의미가 없다. 우리가 제자리를 맴도는 사이 다른 나라들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한다. 이처럼 중요한 구조조정에 대해 경제주체들의 개념이 모두 달라 혼선을 빚고 있다. 정부는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업종 전문화 등을, 기업은 재무구조 개선을 통한 유동성 확보를, 근로자들은 인력감축을 각각 구조조정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조정에 대한 정의와 방향감각이 일치해야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구조조정은 과거의 불합리를 척결하고 현재의 경쟁력을 키워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다. 구조조정은 일시적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과제라는 점을 모든 경제주체가 명심해야 한다.

▽유 원장〓경제 개발 초기에는 정부와 기업이 긴밀하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장기간 지속되는 바람에 정경유착과 경제력 집중 등의 폐해를 낳았다. 재벌이 시장을 전횡하고 스스로 관료조직화하면서 유연성 투명성 정직성을 잃었다. 장사가 되는 산업은 경쟁력을 키우되 안 되는 산업은 퇴출시키는 사업의 기본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금융산업이 제구실을 못한다는 것도 경쟁력을 잃게 된 주요한 요인 중 하나다. 선진국의 기업들은 금융부문이 신속하고 정확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자금에 대한 걱정 없이 편하게 사업을 한다. 은행을 비롯한 한국의 자본시장은 다른 중진국에 비해서도 크게 낙후돼 있다. 은행에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관치 체질은 바뀌지 않았다. 은행들이 대주주인 정부의 눈치를 살피느라 시시콜콜한 의사결정도 하지 못한다.

▽박 회장〓구조조정을 감량경영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개혁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다. 감량경영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또 성급한 경제정책도 스스로 경쟁력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70, 80년대 우리는 섬유 신발산업의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멀쩡한’ 산업을 모두 고사시켰다. 노동집약도가 높아 임금경쟁력이 없는 부문은 해외로 이전하는 것이 맞는 해법이었다. 그러나 부가가치가 높은 소재 부문 등은 국내에 남겨둬야 했다. 대만은 지금도 신발 관련 제품을 연간 40억달러어치씩 수출한다. 미국에도 의류 신발산업은 여전히 존재한다. ‘앞으로 한국이 뭐를 해 먹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많은데 정답은 우리가 전통적인 강점을 가진 제조업이다. 정보기술(IT) 생명기술(BT) 등 신산업은 중요하지만 우리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리지는 못한다.

□구조조정과 경기부양, 무엇이 먼저인가.

▽유 원장〓구조조정을 제대로 하면 경기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예컨대 금융구조조정을 잘하면 중소기업에 돈이 잘 돌아 기업경기가 활성화된다. 공기업 민영화도 지지부진한데 과감하게 민영화를 하면 경쟁력이 상당히 제고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아울러 수출활성화를 강도 높게 추진해야 한다. 양적인 수출 확대뿐만 아니라 기존 제품을 지식화, 고급화해 부가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수출시장으로서의 중국에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다.

▽박 회장〓현재의 불황은 내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세계 경기의 영향이 크다. 독자적인 경기부양 능력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미국과 일본 경기가 호전되지 않으면 백약(百藥)이 무효다. 금리를 낮추면 대기업들에는 혜택을 줄지 모르지만 중소기업과 가계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정부가 돈을 풀어도 은행권에서만 맴도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은 미국 등 세계경기 상황이 나아질 때에 대비해 경쟁력을 키우는 데 주력할 때다.

▽이 전 총리〓경기가 너무 안 좋다고 판단되면 어느 정도 경기부양책을 써야 한다. 하지만 구조조정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경기부양을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건설경기 진작 등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면 인플레이션이라는 후유증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구조조정은 사실상 처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미래가 없다.

□세계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박 회장〓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머지않아 뉴라운드가 시작된다. 모든 법제도 사회시스템 사고방식 등을 세계 표준(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바꿔나가야 한다. 세계에서 물건을 가장 잘 만든다는 일본이 10년째 장기불황을 겪고 있는 원인은 유통시스템 규제 사회인식 등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너무 앞서 나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주 5일 근무제 등이 대표적이다.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베끼면 기업활동을 하기가 지금보다 좋을 것”이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도 나온다.

▽이 전 총리〓우리가 글로벌 스탠더드를 좇는 데만 급급한다면 영영 미국과 유럽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르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가시’를 붙여야 한다. 세계화(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와 함께 지역화(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 특성화(스페셜라이제이션·Specialization)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글로벌라이제이션과 로컬라이제이션을 합한 ‘글로컬라이제이션’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이제는 기업들이 ‘제일’ 대신 ‘유일’에 가치를 둬야 한다. 무작정 똑같이 경쟁해서 앞서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만의 독특한 부가가치를 찾아야 한다. 또 진정한 세계화를 추진하려면 경쟁과 함께 협력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업은 지나친 경쟁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모두가 승자가 되는 ‘윈-윈(win-win)’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면 경쟁자를 누르기 위해 불필요하게 소모하는 에너지와 사회적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유 원장〓글로벌 스탠더드 외에 세계화의 또 다른 키워드는 ‘개방’이다. 외국인직접투자(FDI)를 보면 싱가포르는 국내총생산(GDP)의 7% 수준이지만 한국은 약 0.6%에 불과하다. 홍콩과 대만도 20년 전에 외국인투자를 완전히 개방, 선진국이 됐다. 우리는 외국인투자에 대한 규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국민정서도 외국기업이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투자뿐만 아니라 선진 기술과 정보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수출 신장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핵심기술과 지식을 흡수·응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전 총리〓경제적 자유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장기적인 경제성장률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대기업은 규제를 풀어주고 중소 중견기업은 지원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제를 살리려면

▽박 회장〓지금은 불신과 단절의 시대다. 정부 기업 근로자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 신뢰를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신뢰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각 경제주체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다. 노사정 관계도 마찬가지다. 노사정은 동반자이자 협력자이지 서로 대립해야 하는 상대로 인식하면 안 된다. 최근 기업투자를 자극하기 위해 감세와 재정지원, 금리인하 등의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기업은 정부가 보조금을 준다거나 이자율을 낮춰준다 해서 투자를 하지 않는다. 수익성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고리의 사채를 빌려서라도 투자를 하는 것이 기업의 속성이다. 그 믿음을 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유 원장〓우리 기업인들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천명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 지켜지는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내년 선거 등 정치행사를 앞두고 투자결정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주지사 임기가 4년 단임제인 미국 버지니아주에서는 임기의 마지막 해에 경제가 활성화되는 전통이 있다. 이런 저런 정치적인 부담으로 결정을 하지 못했던 사안들을 후임자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과감하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정치 논리 때문에 실물경제를 위축시키지 말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

▽이 전 총리〓정부의 정책, 기업의 활동, 근로자의 노동, 국민의 경제활동 등에 대해 상호 신뢰가 형성돼야 한다. 기업이 정부를 못 믿고 정부가 기업을 못 믿는다면 큰 문제다. 정부 기업 근로자 국민간 상호 신뢰가 높으면 집단생산성이 높아진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도자는 ‘지향’을 설정하고 나아가게 하는 사람으로, 단순히 현상을 조정하고 다독거리는 관리자와는 다르다. 위기는 곧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이기도 하다.

<정리〓천광암·김승진기자>iam@donga.com

▶대담자 약력

▼이현재▼

△1929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 교수(현 명예 교수)

△한국경제학회 회장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대한민국학술원회장(현 회원)

▼박용성▼

△1940년 출생

△동양맥주사장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두산그룹 부회장

△국제유도연맹회장

△한국마케팅연구원 회장

△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유장희▼

△1941년 출생

△미국 텍사스A&M대 경제학 박사

△미국버지니아코먼웰스대 교수

△한미경제학회 회장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현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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