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포커스/샐러리맨 주식열풍]주가시세따라 환호-탄식

  • 입력 1999년 8월 2일 18시 30분


《주식투자자 300만명, 고객예탁금이 10조원을 넘어서는 등 사람과 돈이 주식으로 몰려들면서 직장마다 주식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사이버거래의 확산과 함께 업무시간에도 주식단말기를 두드리는 모습이 직장의 새 풍속도로 자리잡았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주식투자를 하는 서울지역 회사원 336명의 투자행태를 설문조사한 결과 10명중 4명꼴(39.6%)로 근무시간에 객장을 찾거나 사이버거래를 한다고 대답했다. ‘일과시간에는 주식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람은 14.9%(50명)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35.1%(117명)는 하루 1시간 이상을 주식투자에 쏟고 있었다. 상당수가 ‘주식만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직장인을 비롯한 사회전반의 주식과열 현상이 자칫 국가전체의 생산성 저하와 한탕주의의 만연 등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설문조사는 지난달 23, 26, 27일 사흘동안 서울시내 32개 기업과 여의도 강남 강북 등의 증권사객장 10곳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한 회사원의 ‘주식 24시’

H금융회사의 서울 강남지점 직원 이모씨(29). 그는 97년초 500만원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IMF한파로 ‘깡통’이 됐다. 증권회사쪽으로는 눈길도 안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올초 “요즘같은 저금리시대에 저축하는 사람은 바보다. 앞으로 주식은 무조건 따는 게임이다”는 직장 상사의 권유에 마음이 흔들렸다. 옆자리 동료가 “한달 만에 두 배를 벌었다”고 자랑했다. 마침내 이씨는 4월초 마이너스통장으로 500만원, 은행 대출로 1500만원을 융통해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씨는 오전 8시 출근, 1시간동안 회사동료들과 함께 증권사 정보지와 주식관련 신문기사를 꼼꼼히 살핀다. 사무실 직원 15명 중 11명이 주식을 한다.

오전 9시 주식시장이 열리면 전자수첩 모양의 휴대용 주식거래단말기를 이용, 3∼5분 간격으로 시세를 조회한다. 이른바 ‘사이버거래’. 오전 10시 거래처를 둘러보기 위해 승용차 운전대를 잡은 이씨의 왼손에는 주식단말기가 쥐어져 있다. 신호대기에 걸릴 때마다 주식시세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7월 들어 널뛰기 장세가 이어지면서 조회 건수가 100번 정도로 늘었다. 몇 분 사이에 한 달 월급이 왔다갔다 한다.”

거래처 방문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오후 1시반경은 증권사 객장을 찾아 증권정보지(데일리)를 챙기는 시간. 개장시간(오전 9시∼오후 3시)에는 회사일에 집중할 수 없다. 중요한 약속이나 업무는 오후 3시 이후로 미룬다.

“제일 맥 빠지고 재미없는 날이 토요일이다. 주식시장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주식을 빼면 회사에서 얘깃거리가 없다.”

★주식열풍의 배경

한신경정신과 한상진(韓相進)원장은 “최근의 주식열기는 IMF체제 이후 구겨진 경제적 자존심을 주식투자의 성공으로 보상받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려는 성격이 짙다”고 분석했다.

L기업의 K과장(41)은 근무시간중에 부원들이 사이버 주식거래를 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직원들 대부분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다. IMF이후 그들의 연봉은 간신히 살림을 꾸려나갈 수준으로 떨어졌다. ‘회사 일만 열심히 하라’고 말할 염치가 내게는 없다.”

정부의 증시부양책과 주식투자를 애국심에 연결시키는 증권사의 상술도 투자자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요인.

밸류투자자문 조충제(趙忠濟)차장은 “‘주식투자는 최고의 재테크 수단이자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인식이 ‘주식 때문에 본업을 소홀히 한다’는 죄책감을 묽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음란사이트의 아성(牙城)은 사이버 주식거래로 무너졌고 실업률은 종합주가지수에 가려져 버렸다.” 요즘 증권가에서 유행하는 농담이다.

★사이버거래의 확산

6월 한달간 사이버 주식거래액은 24조8425억원. 지난해 연중 총거래액(11조4146억원)의 2배 이상이다.

대신증권 강대형(姜大馨)서대문지점장은 “사이버거래가 본격화하면서 전문직 종사자와 직장에 매여 있는 회사원 공무원 등의 주식투자가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사이버거래는 주식투자를 일종의 게임처럼 느끼게 하기 때문에 젊은 직장인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7월 중순 모 대기업의 사원 재교육 현장. 교육생 30명 중 20여명이 책상 밑에 숨겨둔 PCS나 휴대용 주식단말기로 주식시세를 조회하고 있었다. 교육생 윤모씨(30)는 “내가 산 주식 값이 오를 지, 전망이 나쁘다고 판단해 처분한 주식 값이 정말 떨어질 지를 체크하는 것은 컴퓨터게임 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일”이라고 말했다.

휴대용 단말기에 무선주식거래서비스를 제공하는 에어미디어사에 따르면 6월말 현재 서비스 가입자는 3만1867명. 지난해말(1만1586명)보다 2만명 이상 늘었다.

1인당 하루평균 주식정보 조회건수는 54.8건, 주문 및 잔고 조회건수는 3.8건. 주식시장이 열려 있는 5시간 동안 5분에 한번꼴로 휴대용 단말기를 두드리는 셈이다.

★‘주식중독’의 위험

“목사님, 요즘 주식시세가 어떻습니까.”

벤처기업에 취직한 C씨(31)는 4월 4주간 강원도의 한 부대에서 병역특례자 기본훈련을 받았다. 그는 일요일마다 훈련소 교회의 목사에게 주식시세를 물었다.

K씨는 “증권사 직원에게 ‘얼마에 팔아달라’는 주문을 내고 입소했다. 그러나 너무 궁금하고 불안했다. 고된 군사훈련보다 주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더 참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류인균(柳仁均·신경정신과)교수는 “주식시장이 쉬는 주말에 허전해지고 안절부절못하면 중독의 위험이 있다”며 “주식에 쏟는 시간의 양보다 그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기능의 장애가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윤종구 이철용 부형권기자>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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