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사태라는 핵폭탄으로 시작된 97년은 기아사태를 거쳐 국제통화기금(IMF)시대로 흘러갔다. 무너진 재벌들의 경우 일본 야마이치증권의 도산때 사장이 눈물을 흘렸던 것과는 달리 반성과 사죄는커녕 모든 책임을 제삼자에게 돌려왔다. 기아와의 줄다리기에 이어 외환위기에 관련한 정부의 「오리발작전」은 끝내 한국경제를 IMF 통치하로 몰아넣고 말았다. 재벌들은 부랴부랴 구조조정이다 인력감원이다 뒤늦은 처방책으로 사태 해결에 나서고 있지만 문어발식으로 확장한 계열사를 정리하겠다는 곳은 없고 잘려나가느니 근로자들 뿐이다. 이 와중에서 재계 금융계 정부에서는 씁쓸하고도 허탈한 수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이 말들을 통해 97 한국경제의 궤적을 따라가본다.》
◇재계
▼『이번 한보사태는 누군가 한보철강을 인수하기 위해 꾸민 일이다. 법정관리를 신청해 놓고 제삼자 인수 때 그자가 나타날 것이다』
―1월 한보그룹 정태수(鄭泰守)총회장이 「한보철강의 부도는 정부와 기존업계의 한보흔들기」라고 주장하면서.
▼『국민기업인 한보에 무슨 부도냐. 내 뒤를 봐주는 사람을 알지 않느냐』
―2월22일 제일은행측으로부터 최종부도처리를 통보받은 정태수총회장이 배후세력이 있다고 밝히면서.
▼『우리가 부도난 것은 정부의 세계화정책 때문. 진로소주의 해외판매 및 해외사업 강화로 초래된 자금난이 직접적인 원인』
―4월 진로그룹 장진호(張震浩)회장이 부도가 나자책임을제삼자에게돌리면서.
▼『치욕이다. 비참한 하루다. 음해세력이 있다』
―7월15일 김선홍(金善弘)기아그룹회장이 기아의 부도유예협약지정 소식을 들은 뒤.
▼『삼성은 자동차 진출 초기때부터 기존 업체를 인수해 경쟁력을 갖출 생각은 없었다』
―7월22일 삼성자동차 임경춘(林慶春)부회장이 기아사태가 난 직후 기아사태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자 기자회견장에서. 결국 삼성 「신수종보고서」가 드러나면서 이는 거짓말로 귀착됐다.
▼『사자가 다친 얼룩말을 잡아먹으려고 한다. 얼룩말이 다리를 다쳤으면 찍지 말고 붕대로 감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기아는 비브리오균에 감염된 집단 식중독환자다. 가장 경험이 많은 의사가 나서서 병을 고쳐야 한다』
―8월 김선홍회장이 사장단회의에서 기아의 부도는 기아의 책임이 가장 크며 결국 치료는 자신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회장이 뭐 하는 게 있겠느냐. 나는 바람을 받아 목적지까지 배가 갈 수 있도록 하는 황포돛대일 뿐이다』
―10월 퇴진압력을 받던 김선홍회장이 기아정상화에만 관심이 있을 뿐 경영권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펼친 「황포돛대론」.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고 있다. 중소기업의 신음소리가 정말 안 들리느냐』
―기아사태의 장기화로 끝내 부도를 맞고 화의신청을 한 서울차륜공업의 노광섭(盧光燮)사장이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삼성자동차가 흡수합병을 하거나 흡수합병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11월 이건희(李健熙)삼성그룹회장이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의견을 밝히면서.
▼『국민들이 경제인을 믿지 못해서 그렇다. 경제가 추락하고 나서야 「경제인들 말이 맞았구나」 할 것이다』
―11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회의에서 조석래(趙錫來)효성그룹회장이 재벌에 대한 불신을 못마땅해하며.
▼『IMF는 「I'M Fired(나는 해고당했다)」의 준말』
―IMF 체제로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실업의 위험을 느끼게 된 샐러리맨의 자조섞인 글자풀이.
◇금융계
▼『특혜의 기준이 무엇인가. 포항제철도 건설 당시 금융권으로부터 대규모의 지원을 받지 않았나』
―1월23일 신광식(申光湜)전제일은행장, 한보철강이 최종부도처리되면서 기자들이 특혜설을 제기한 데 대해.
▼『그런 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4월9일 이철수(李喆洙)전제일은행장, 한보청문회에서 신한국당 김문수(金文洙)의원이 「시중은행 인사에 정치권이 개입하기도 한다. 대출과정에서 정치권의 청탁을 거절하기 어렵다고 보는데…」라고 질문하자.
▼『한보청문회가 실체적 진실규명은 하지 못하고 애꿎은 증인만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비난이 일지 않을까 걱정된다』
―4월9일 신한국당 김학원(金學元)의원, 청문회 증인이었던 박석태(朴錫台)전제일은행상무의 자살소식을 듣고.
▼『정부가 금융개혁위원회의 개혁안을 토대로 만든 최종안에 학자로서 학점을 매긴다면 C학점 이하를 줄 수밖에 없다』
―6월20일 서강대 김병주(金秉柱 금개위부위원장)교수, 정부의 금융개혁안을 둘러싸고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간의 논란이 일 때 본보와 인터뷰에서.
▼『현재 기업이 처해 있는 어려움에 인식을 같이하고 금융시장이 호전될 때까지 자금회수를 억제하고 기존여신 수준을 유지하기로 했다』
―8월22일 30개 종합금융사 사장단 결의.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음.
▼『달러화를 사는 기업들은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외환당국, 9,10월 달러 상승세를 막기 위해 구두개입을 하면서 상투적으로 사용한 말.
▼『외환시장에서 정부의 태도는 늑대와 양치기소년의 우화를 생각나게 한다』
―외환딜러들, 9,10월 정부가 환율상승을 강력히 저지하겠다고 공언해 놓고 저지선을 거듭 후퇴하자.
▼『협조융자협약을 은행 자율로 만들자는 주장은 이상론에 불과하다. 자율적으로 하자면 회의 참석도 안하는데 어떻게 자율적으로 만들 수 있느냐. 재정경제원과 은행감독원이 나서야 한다』
―10월21일 S은행장, 부총리―은행장 간담회에서.
▼『IMF 시대에는 현상유지할 생각도 버려라. 앞으로 3년간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생각만 갖고 사업을 해라』
―한국은행 고위관계자, 사업하는 아들에게 당부한 말.
▼『강경식(姜慶植)경제부총리가 물러나면 1백포인트. 김선홍회장이 물러나면 1백포인트. 강삼재신한국당 사무총장이 물러나면 1백포인트. 종합주가지수가 합계 3백포인트는 거뜬히 오를 것이다』
―기아사태 장기화, 정부의 정책부재, 당시 신한국당의 경제흔들기를 비판하는 한 증권투자가의 말.
▼『아프리카에 사는 무서운 부족의 이름은 「담보부족」이며 이들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깡통차기」다』
―종합주가지수가 300선으로 떨어져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산 투자자들의 악성 담보부족계좌, 깡통계좌가 급증하자 투자자들이 한 말.
▼『외국인들은 「외세」, 개인투자자들은 「의병」, 기관투자가는 「관군」이다』
―한국 주식시장에 환멸을 느낀 외국인들이 대거 주식매도 공세를 편데 맞서 외롭게 주식을 사들인 개미군단들은 구한말 의병에, 자금여력이 없는 기관투자가는 지리멸렬한 당시 관군에 비유된 것.
▼『주식시장은 환장(換場)』
―어느 해보다 환율에 따라 주가변동이 심했다는 뜻. 그러나 깡통을 찬 투자자들은 「환장할 노릇」이라는 것.
▼『담배 한 갑이면 은행주를 산다』
―주가가 폭락, 은행주가 1천원대로 떨어지자 투자자들이 한 말.
▼『중국은 1인당 소득이 6백달러밖에 안된다. 1인당 1만달러가 넘는 한국을 지원하려면 인민들에 대한 정치적 설득이 필요하다』
―12월2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한국정부측으로부터 자금지원요청을 받은 중국 인민은행 쥬샤오추완(周小川)부행장의 대답.◇정부▼『지금의 금융실명제는 비리척결 수단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실명제를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방법상에 문제가 있었다』
―3월 강경식경제부총리가 취임일성으로 실명제 보완론을 피력하면서.
▼『우리 금융시장의 가장 큰 문제인 부실채권 정리를 위해 성업공사를 개편하는 등 준비를 했다. 실기(失機)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8월25일 금융시장안정대책 발표 기자회견 자리에서 「정부정책이 실기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강경식부총리 답변.
▼『지난 1백일 동안 우리경제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으며 대책이 늦게 나온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10월22일 강경식부총리가 3개월을 끌었던 기아자동차 문제를 「공기업화」로 매듭지으면서.
▼『금융개혁 관련법안 입법 추진 등 그동안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아쉽다』
―11월19일강경식부총리가퇴임하면서.
▼『금융개혁법안이 99.99%까지 성사됐다가 정치적 동기와 이해집단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통과되지 못했다.나중에 역사적 평가를 받고 싶다』
―11월19일 김인호(金仁浩)청와대경제수석이 물러나면서.
▼『현직을 떠난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할 입장에 있지 않다』
―11월20일 밤 IMF 구제금융신청 여부를 확인하는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강경식 전부총리의 대답(강부총리는 나흘전 미셸 캉드쉬 IMF총재와 만나 구제금융신청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한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먹구구식인지 말해 달라. 지금은 정부에 힘을 모아줘야 할 때지 잘잘못을 가릴 때가 아니다』
―12월5일 임창열(林昌烈)경제부총리가 IMF와의 자금지원 조건을 밝히는 기자회견석상에서 「외환보유고 관리 등을 주먹구구식으로 해온데 대한 문책론이 일고 있다」는 지적을 받자.
▼『연25%에 달하는 현재의 회사채 금리수준에서는 기업이 살 수 없다』
―12월11일 임창열부총리가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고금리는 곧 안정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외환시장에 관한 거짓말은 국회에서도 용인되는 것 아닌가』
―12월15일 밤10시 김우석(金宇錫)재경원 국제금융증권심의관이 환율제한폭철폐를 전격발표하는 자리에서 「낮에는 제한폭철폐를 왜 부인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정리〓천광암·박현진·이용재기자〉